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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무비] '앵커'가 바라보는 엄마라는 이름의 공포

[이은선의 픽(pick)무비] '앵커'가 바라보는 엄마라는 이름의 공포

  • 기자명 이은선
  • 입력 2022.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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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제 죽음이 정세라 앵커의 입을 통해 보도되면...너무 기쁠 것 같아요.” 뉴스 생방송 시작 5분 전, 한 방송국의 간판 앵커 세라(천우희)에게 걸려온 제보 전화다.

신상을 밝힌 제보자는 자신의 집에 침입한 ‘그 사람’이 자신의 딸을 해쳤으며 이내 자신마저 죽일 것이라 말한다. 그러나 다급한 상황과 달리 세라를 지목해 자신의 바람까지 덧붙이는 말을 믿어야 할까.

세라는 단순 장난 전화로 판단하고 방송을 마친다. 그러나 어딘가 석연치 않은 마음은 결국 세라를 제보자의 주소지로 이끈다. 그날 밤, 세라는 죽어있는 모녀를 발견한다.

사건 현장을 직접 목격한 세라가 취재해 단독으로 내보낸 ‘지천동 모녀 살인사건’을 향한 사회적 관심은 높아만 간다. 방송국 개편을 앞두고 자리를 보존해야 하는 세라로서는 놓칠 수 없는 기회다.

자기도 모르게 점점 사건에 집착하던 세라는 알 수 없는 환각에 시달린다. 다시 찾은 사건 현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제보자의 정신과 담당 의사였다는 인호(신하균)도 여러모로 미심쩍다.

살인사건에 얽혀든 주인공의 사연처럼 보였던 <앵커>가 예상 밖의 전개로 흘러가는 것은 인호가 등장하는 시점부터다. 초반 사건은 세라의 내면으로 들어가기 위한 진입로에 불과하다. 인호를 통해 최면 치료를 받는 세라의 모습을 신호탄으로 <앵커>는 영화가 품고 있던 또 다른 이야기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세라가 취재하는 ‘지천동 모녀 살인사건’은 뉴스에서 종종 보도되는 실제 사회 문제가 반영됐다. 극 중에서 이 사건은 조현병에 시달리던 엄마가 자녀와 함께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한 것으로 밝혀진다.

영화는 심리 전문가 캐릭터의 입을 빌려 ‘동반 자살’이라는 자극적이고 잘못된 표현 대신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이 사건이 아버지가 아이를 부양하는 한 부모 가정에 비해 어머니가 홀로 아이를 키우는 경우에 더 높은 비율로 일어나는 일임을 지적한다. 이는 홀로 출산과 양육을 책임지는 여성들이 짊어진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극단적으로 시사한다.

세라에게 이 사건이 연결된 이유가 있다. 그에게는 앵커로 일하는 딸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한 엄마 소정(이혜영)이 있다. 그리고 이 모녀에게는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슬픈 사정이 존재한다.

점차 현실과 환각의 경계가 무너지는 세라를 따라가다 보면, 그 끝에는 몬 관계라는 깊은 심연이 존재한다. <앵커>가 들여다보고자 했던 핵심은 결국 이것이다.  

영화는 축복과 모성 같은 이상적 개념 아래 잘 드러나지 않았던, 하지만 현실적인 여성들의 고뇌와 공포를 주목한다. 여기에는 사회적 존재로서 욕망하는 것과 엄마로서의 삶 사이에 서서 선택을 내려야 하는 여성들이 있다.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세라도 실은 메인 앵커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전방위적 압박을 버티고 있는 신세다. 엄마가 되기를 선택하는 순간, 그에게 임신은 경력의 무덤이 될 것이 뻔하다. 홀로 세라를 키우면서 자신의 모든 사회적 지위를 포기해야 했던 엄마 소정처럼. 

비약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는 엄연한 현실이기도 하다. 여성의 경력 단절은 사회 전체의 차원에서 고민되지 못하고 개인의 문제로 수렴되곤 한다. 예전에 비해 인식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출산과 육아가 고스란히 여성의 몫으로, 혹은 여성에게 훨씬 더 크게 전가되는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그 안에서 때로 여성들은 선택을 강요당한다. 개인의 욕망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엄마이기를 포기하거나. 서로의 거울 같은 존재인 엄마와 딸 사이에 애증이 자리하는 것도 현실적인 설정이다. 자녀는 행복인 동시에 때로 불행의 증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앵커>는 그 서늘하고도 서글픈 현실을 에두르지 않고 들여다본다.

남성 조직 내 암투 같은 단골 소재가 아니라 여성 주인공이 중심에 서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장르영화라는 점, 사건 자체에 집중하기보다 인물의 내면을 깊숙하게 들여다보는 심리극이라는 점에서 신선하고 반가운 시도다.

완벽을 향한 욕망이 광기 어린 집착으로 변해가는 인물의 모습을 탐구한다는 점에서는 <블랙 스완>(2010) 같은 영화들을 떠오르게 한다. 

아쉬운 점이 없지는 않다. 초반 사건과 인물을 엮는 전체적인 연결이 아주 매끄럽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복선은 기계적인 배치로 보이기도 한다.

클라이맥스도 조금은 설명적으로 매듭지어진 인상을 남긴다. 중요한 사회적 이슈를 지적하고 있는 작품인 만큼 각본과 연출에서 보다 세심한 접근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극 전체를 지탱하는 배우들의 연기는 안정적이다. 천우희는 앵커로서의 자부심과 불안, 어머니를 향한 사랑과 증오라는 양가감정을 계속해서 오가는 세라를 통해 예리하고 섬세한 연기를 선보인다. 분절적으로 등장하지만 그때마다 적절한 깊이감을 만들어내는 이혜영과 신하균의 관록도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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