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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무비] 역사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에픽, '파친코'

[이은선의 픽(pick)무비] 역사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에픽, '파친코'

  • 기자명 이은선
  • 입력 2022.04.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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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 소설 <파친코>는 일종의 선언으로부터 출발한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이는 주인공 선자를 중심으로 그의 부모, 선자 부부, 자식과 손자 세대까지 1910년부터 1980년대까지 4대에 걸쳐 펼쳐지는 방대한 이야기를 함축하는 강렬한 문장이기도 하다.

거대한 파도처럼 덮쳐오는 역사의 굽이를 넘고 버티며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들. 그들은 역사를 원망하는 대신 삶을 회고한다.

책은 북미에서 2017년 발간된 후 전 세계적으로 반향을 일으켰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추천작으로도 유명하다.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은 1989년 예일대 역사학과에 재학 중 들었던 강연으로부터 이야기를 구상했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했던 미국 선교사들은 자이니치(재일교포)들이 일본 사회 내에서 심하게 차별당한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중에는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중학생 아이의 사연도 있었다.

이후 작가는 남편을 따라 일본 도쿄에 살게 되면서 수많은 자이니치들의 사연을 수집했고, 30여 년간 가슴에 품고 있던 이야기를 소설로 완성했다.

그에게 일제 강점기부터 이어져온 한국인의 역사는 웅장한 서사시처럼 다가왔다. 비극적인 고통 속에서도 강인하게 삶을 이어온 이들에게서 끈질긴 의지와 영웅적 긍지를 느낀 것이다. 이국땅에서 오래도록 이민자로 살아온 작가 본인의 경험 또한 재일교포들의 사연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파친코>는 낯선 곳에 새롭게 뿌리내리며 차별과 역사의 굴곡을 버텨낸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가 됐다.

파친코 운영은 재일교포들이 무시당하지 않고 자이니치로 살아갈 수 있던 유일한 사업이다. 책에서는 결과적으로 선자의 자식 그리고 손자까지 이 일에 뛰어들게 된다. 시대배경이 인물들에게 남긴 상흔을 상징하는 공간인 셈이다.

시대가 자신의 삶을 쥐고 흔드는 동안 덧없고 우연한 행복만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도 <파친코>라는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지난 3월 25일 OTT 서비스 애플TV+를 통해 공개된 <파친코>는 이 책을 8부작 드라마로 옮긴 작품이다. 초반 3편을 한꺼번에 공개한 후 일주일에 한 편씩 새 에피소드를 공개하는 방식이다.

드라마는 소설 속 인물 구조와 서사를 그대로 가져오되, 선자의 어린 시절부터 시간 순으로 배열된 원작의 타임라인을 과감하게 뒤섞었다. 한 회차 안에서도 젊은 선자(김민하)와 나이 든 선자(윤여정), 손자 솔로몬(진하)의 사연이 여러 번 교차되는 식이다.

일제 강점기 시대의 부산, 선자는 홀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며 억척스럽게 살림을 꾸려간다. 비극은 선자가 자갈치 시장을 관장하는 실세 한수(이민호)와 사랑에 빠지면서 시작된다.

선자는 한수의 아이를 가지지만 그는 이미 일본 오사카에 부인과 딸들을 둔 유부남이다. 결혼은 불가하지만 부족함 없이 먹고 살게 해주겠다는 한수의 제안을 거절한 선자는, 이후 하숙집의 손님으로 왔던 평양 출신 목사 이삭(노상현)의 제안으로 그와 결혼해 일본 오사카로 간다. 1930년대, 낯선 땅에서 자이니치로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한국 배우들이 출연하고 한국인이 주인공이지만 <파친코>는 미국 자본으로 완성된 미국 작품이다. 애플TV+가 1000억 원의 제작비를 쏟아부은 대작으로도 일찌감치 화제였다. <기생충>(2019),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2021) 등 한국 컨텐츠가 전 세계에서 화제성을 입증하기 이전부터 제작이 진행된 작품이라는 점이 고무적이다.

처음 이 프로젝트가 발표됐을 때 북미 내에서는 기대보다는 우려의 시선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국어, 영어, 일본어 등 다국적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작품인 데다 아시아 배우들이 주축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OTT 플랫폼들이 대사를 영어로 바꾸거나 북미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방안 등을 고려하며 난색을 표했으나, 원작의 가치를 믿은 애플TV+의 과감한 투자가 지금의 <파친코>를 가능하게 했다.

전체 에피소드가 공개되기 전이지만 이미 이 작품은 올해 최고의 시리즈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는 분위기다. 일제 강점기와 1980년대 버블 경제 상황의 일본은 여러 미디어에서 이미 숱하게 다뤄진 시대 배경이다.

그러나 한국계 미국인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 감독의 연출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읽게 한다. 민족 정서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완전히 다른 시각과 해석으로 이야기에 접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시대와 인물을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다.

시대를 넘나드는 교차 편집과 과감한 음악사용, 편집의 감각은 작품이 지닌 역사적 무게감이 두드러질 예상을 뒤엎고 스타일리시한 감각마저 전달한다.

그러면서도 각 인물들의 감정은 훨씬 정확하게 연결되고, 시청자의 경험은 더욱 풍성하게 확장된다. 원작 속 선형적 사건들과 행간의 침묵에서는 읽을 수 없던 것들이다. 영상화의 강점을 십분 살린 결과다.

재일교포 2세대인 솔로몬이 여전히 국제 사회의 차별적 시선 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돈을 좇으며 몸부림치는 동안, 동시에 카메라는 쌀밥 한 그릇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1930년대의 선자의 상황도 비춘다.

1980년대의 선자가 할머니가 되어 다시 밟은 고국 땅 앞에서 눈물짓는 동안, 처음 오사카로 가기 위해 배에 오르는 젊은 선자의 고생길이 나란히 비춰진다. 서로 다른 시공간 속 인물들의 입체적인 연결은 긴 세월 동안 고통스럽게 이어진 디아스포라(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의 역사 그 자체다.

<파친코> 속 여성들은 못 배우고 가난하지만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훼손하지 않고 억척스럽게 노동하며 가족을 먹여 살린다. 이야기는 그들의 시선으로 다시 쓴 역사이며, 우리가 처음으로 제대로 마주하게 된 전 세계 모든 선자들의 사연이다.

이 목소리는 이민사회를 경험하지 않은 이들에게도 보편적인 감정에의 호소로 가닿는다. 역사가 망쳐놨지만, 끝내 살아남고 버텨낸 존재들의 값진 증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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