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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주년 광복절] “대한민국은 의병의 나라다."

[제77주년 광복절] “대한민국은 의병의 나라다."

  • 기자명 박두웅 기자
  • 입력 2022.08.14 19:56
  • 수정 2022.08.1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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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가뜨릴대로 망가뜨리고 나면 민중이 일어나는 나라
의병은 정권을 탐하지도, 승자의 월계관도 요구하지 않았다

홍주의병 김복환 및 후기 의병부대. (사진=독립기념관)
홍주의병 김복환 및 후기 의병부대. (사진=독립기념관)

[뉴스더원 충남=박두웅 기자]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우리 주권을 일본에 송두리째 넘기는 한일합병 문서에 조인했고, 8월 29일 이를 공포함으로써 27대 519년 만에 조선왕조는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됐다.

2022년 8월 15일은 8·15광복 77주년이 되는 날이다. 1945년 8·15광복은 미국·영국·러시아 등 50여 개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무려 14만 명의 항일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끈질기게 전개한 항일독립운동의 결실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을 축으로 하는 민족분단이라는 냉전 시대의 제물이 되는 운명을 극복하지 못했다. 3·8선을 경계로 북쪽은 소련이, 남쪽은 미국이 분할 점령하고 군정을 시행했다. 그 수단은 이데올로기였다.

미군정은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강제로 해체하고 일제에 협력한 전범들을 주요 관직에 기용했다. 이승만 정부 초기 내각은 이시영 부통령, 이범석 총리 겸 국방장관 등 독립운동가들을 하나씩 제거해 친일파 내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대통령과 그를 둘러싼 친일파들이 1949년 6월 6일 반민특위를 해체하는 바람에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민족정기와 사회정의를 상실한 채 오랫동안 독재와 부패세력의 지배를 받게 됐다.

광복 77년을 맞이한 오늘도 길거리에는 보수, 진보의 탈을 쓰고 권력투쟁의 탐욕을 드러내는 현수막들이 버젓이 나부끼고 있다. ‘빨갱이’라는 단어 대신 ‘좌파’라는 어휘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빨갱이 뉘앙스를 전달하려 하기도, ‘보수 우파’라는 말로 ‘독재’라는 이미지를 각인시키려 하고 있다.

이익은 사유화하고 손실은 사회화한다. 미국보다 더 심한 자유주의, 즉 승자독식의 방임 자유주의가 한국적 자유주의가 됐다. 정치판은 이미 국민과는 동떨어진 기득권 세력의 승자들이 상대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탐욕의 격전장으로 전락했다. 

대한민국은 의병의 나라다. 1592년 임진왜란이 그러했고, 1894년 동학혁명, 그리고 일제강점기 35년이 그랬다. 현대에 와서는 5·18 민주화운동과 2016년 8월까지의 촛불혁명이 그랬다.

‘의병’이란 용어가 시대의 변천 과정에서 ‘독립군’, ‘시민운동’, ‘촛불’ 등으로 달리 표현되고 있지만,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민족의 특성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한민족은 사회 기득권 세력이 나라를 망가뜨릴대로 망가뜨리고 나면, 민중이 일어났다. 이름 없는 백성들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떨쳐 일어난다.

의병은 목적이 달성되면 떠오르는 태양 빛에 아침이슬처럼 사라진다. 정권을 탐하지도, 승자의 월계관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혁명의 과정에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 의해 기록된 ‘범죄자’라는 기록뿐이다.

충남의 ‘숨은 의병장’ 다수 찾아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독립운동가 찾기 사업 3년째 

의병 이관도 관련 사진. 1909년 6월 충남관찰사가 박제순 내부대신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사진=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의병 이관도 관련 사진. 1909년 6월 충남관찰사가 박제순 내부대신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사진=충남역사문화연구원)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독립운동가 찾기 사업이 3년 째에 이르고 있다. 이름 없는 의병은 재판 없이 즉결 처분된 경우가 많고, 관련 자료가 대부분 사라져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사업이다. 이에 이미 밝혀진 다른 의병의 재판기록, 의병 관련 자료 등을 활용해 고고학 발굴처럼 그 흔적을 찾아 나선 ‘적극성’이 빛을 발하고 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2020년부터 서훈받지 못한 일명 ‘숨은 독립운동가’ 발굴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예산군은 지난해 기초지자체로서 가장 많은 38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해 국가보훈처 표창까지 받았다. 또 서산 9명, 천안 7명 총 16명의 미서훈 의병에 대해 공적조서를 작성했고, 국가보훈처 서훈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독립유공자 수는 7월 현재 충남도가 1천608명으로, 경북(2천394명)에 이어 두 번째이며 3위는 경기도로 1천466명이다. 이처럼 충남역사문화연구원의 노력에 힘입어 충남도 독립유공자는 현재 700여 명이 서훈 심사 중이며, 곧 전국 최다의 독립유공자를 발굴하는 광역단체로 등극할 전망이다.

홍주의병, 독립운동의 불씨가 되다
“의병 20~30명 이끌고 군자금 모으고 헌병대 습격”
배를 타고 섬·육지 오가는 기동성 발휘하기도

1906년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홍주성 탈환을 위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으로, 1975년 제작된 장리석 작가의 민족 기록화. (사진=독립기념관)
1906년 민종식이 이끄는 의병부대가 홍주성 탈환을 위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으로, 1975년 제작된 장리석 작가의 민족 기록화. (사진=독립기념관)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발간 '내포의 한말의병과 독립운동 총서'(내포지역 전기의병-김상기 충남대 국사학과 교수 저)에 따르면 19세기 말부터 일제의 침략에 맞서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된다. 한말 의병은 봉기한 시기에 따라 전기의병, 중기의병, 후기의병의 3기에 걸쳐 전개됐다.

충청지역 항일의병은 의병 전 기간에 걸쳐 치열하게 전개됐다. 최초의 을미의병이 대전의 유성에서 일어났다. 대구 출신으로 진잠현감을 역임한 문석봉은 1895년 9월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자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공주부에서 파견한 관군과의 항전에서 패퇴, 경상도로 내려가 재기를 도모하던 중 대구부에서 파견한 순검에 의해 체포됐다가 탈옥해 원주에서 재기를 도모하던 와중에 병으로 순국했다.

충남 홍성에서는 승정원 승지를 지낸 김복한과 이설 등이 재지 유생인 안병찬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비록 홍주관찰사 이승우의 변심으로 체포됐지만, 이들의 항쟁은 1906년 홍주성 전투의 씨앗이 됐다.

홍주성 전투는 전국적인 항일의병을 선도한 대규모 무장투쟁이며 한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한 독립전쟁이었다. 홍주 의병은 경술국치 이후에는 독립전쟁으로 계승된다.

홍주의병 동상. (사진=박두웅 기자)
홍주의병 동상. (사진=박두웅 기자)

홍주의병 중 김한종, 장두한, 신현두, 성달한, 윤병일, 성문영, 유창순, 한훈 등은 광복회 설립을 주도하고, 국내 항일비밀단체 결성에 나선다. 또 김복한 등은 파리장서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홍주의병은 1910년대 독립전쟁과 나아가 3·1운동으로까지 인적·사상적 영향을 미쳤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에서 밝혀낸 의병 활동 명세의 독립운동사적 가치도 높다.  

공적조서에 따르면 의병 16명 중 대다수가 의병장들로 이들은 부하 20~30명씩 이끌며, 군자금을 모으거나 일본 헌병대 등을 습격했다. 1907년 한말 군대 해산으로 촉발된 정미의병은 1909년 말까지 계속됐다. ‘폭도에 관한 편책’의 보고 문건에서는 의병을 폭도로 부르고, 의병장은 수괴(首魁:도적 두목)로 지칭했다.

“수괴 이관도(李寬道)가 인솔하는 부하 약 20명이 예산 대흥군 마을을 습격·방화해 순사 4명이 곧바로 출동했으나 폭도들은 유구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들 폭도는 군수금을 강요한다는 소문이 있다.” 이는 1909년 6월 충남관찰사가 박제순 내부대신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이관도 부대는 청양·홍성·예산 일대를 돌며 군자금을 모았다. 총·칼로 무장한 이들은 주재소 순사들과의 전투도 불사했다. 홍주경찰서와 헌병분견소는 ‘변장순사’까지 투입해 이들 검거에 주력했으나 이들은 보령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는 등 맹활약을 했다. 그는 이번에 서훈 신청 대상이 됐으나, 부하 3명은 2016년 이미 애국장을 받았다.

배를 이용해 섬·육지를 오가며 항일투쟁에 나선 의병들도 있었다. 신기석(申奇石) 부대는 배를 타고 이동하면서 소난지도 등 서산· 당진의 섬과 내륙을 오가며 의병 활동을 펼쳤다. 탁월한 기동성으로 그들을 잡으려는 일본 헌병들 애를 태웠을 것이다.

신기석은 1908년 10월 부대원 30명을 배를 태우고 서산 독곳(대산읍)에서 태안 쪽으로 도주했다. 면천의 헌병분견소는 추적에 실패한 정황을 조선통감부에 보고했다. 

농민 출신도 많았다. 당진 농민 출신인 최종성(崔鐘成)은 서산·해미·면천 등에서 활약한 의병장이다. 1909년 조선통감부 자료에 따르면 부하는 약 30명이었다. 

천안 목천의 박관실(朴寬實)은 1907년부터 2년 간 목천·진천·청주·연기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일본군 문서인 ‘폭도수괴 명부’에 따르면 그는 육군 참위 출신으로 부하는 16명이었다. 오래전 “박관실 부대에서 군자금 모집 등 의병 활동을 했다”는 공로로 3명이 애국장을 받았으나 정작 그는 제외됐다.

천안 원서면(풍세면)의 김무진(金戊辰)은 1908년 12월 대전지검 공주지청으로부터 ‘내란·강도’ 혐의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김 씨와 같은 죄명으로 같은 판결 기관에서 같은 날짜에 판결받은 의병이 확인되고, 당시 시대적인 상황을 판단하여 김무진이 의병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조한필 원장은 “2021년 발굴한 천안과 서산출신의 의병 이외에도 예산 출신 의병 2명, 부여 출신 의병 21명, 서천 출신 의병 1명 등 많은 의병들의 활동상을 확인하였다”며서 “올해 진행하고 있는 홍성과 아산에서도 의병뿐 아니라 많은 미서훈 독립운동가들이 발굴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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