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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영화 '한산'의 역사적 사실과 등장 왜장들의 후속담

[기획] 영화 '한산'의 역사적 사실과 등장 왜장들의 후속담

  • 기자명 권혁신 시민기자
  • 입력 2022.08.04 1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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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한산: 용의 출현' 포스터.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뉴스더원=권혁민 시민기자] 대한민국 최고의 흥행 감독으로 손꼽히는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인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의 흥행 속도가 눈부시다.

이 기사를 작성하는 8월 3일 현재, 개봉 8일 만에 관객 3백만을 돌파하며 천만 관객 돌파는 물론이고 이순식 3부작 중 첫 번째 작품인 <명량>이 세운 역대 최대 관객 기록인 1760만 명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초미의 관심사다.

300만 관객 돌파를 축하하는 배우와 감독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300만 관객 돌파를 축하하는 배우와 감독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쉽게도 <명량>의 흥행속도에 비교하면 <한산>의 실적은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개봉 6일 차 기준으로 <한산>이 265만 명을 동원한 데 반해 <명량>은 500만 명이 넘는 관객수를 기록했다는 것만 놓고 봐도 <한산>이 <명량>의 흥행 성적의 절반이 조금 넘는 수치에 그치고 있고, <명량>의 흥행 기록을 뛰어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라고 쉽게 예상할 수 있다.

물론 개봉 둘째 주에 오히려 무서운 뒷심을 발하는 영화가 없는 것도 아니며, 코로나 재확산이라는 악재가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할 것이기에 속단은 금물이나 개봉 후 쏟아진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에 비해 <한산>의 흥행 속도가 조금 아쉬운 건 사실이다.

특히 전작 <명량>이 어마어마한 흥행을 했음에도 제기된 수많은 지적들, 역사적 사실의 왜곡이나 지나친 신파, 작위적인 연출 등의 요소를 이번 <한산>이 상당 부분 걷어냈음에도 흥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의 개인적인 예상으론 <한산>이 <명량>보다 해외에서 훨씬 큰 흥행을 할 것으로 보이기에 진정한 흥행 성적표는 해외 개봉 이후에 가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과연 <한산>은 전작 <명량>에서 제기된 역사적 사실의 왜곡에서 얼마나 자유로운지 한번 알아보겠다. 이제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나올 수 있으니 영화 <한산>을 안 본 이들은 더 이상 스크롤을 내리지 않아도 좋다.

<한산>의 내용과 실제 역사

1)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과연 다른 왜장들의 함선을 빼앗아 전투에 나섰는가?

변요한이 연기한 와키자카 와스하루. 이순신 장군 못지 않은 지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변요한이 연기한 와키자카 와스하루. 이순신 장군 못지 않은 지장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에선 이순신 장군의 맞수처럼 등장하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동료 왜장들인 가토 요시아키와 구키 요시타카와 갈등 끝에 기습하여 그들을 내쫓은 후 그들의 함선까지 끌고서 견내량으로 나가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의 전개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각색된 것으로 실제로는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공을 세우기 위해 동료들 몰래 무리하게 먼저 출진했다가 이순신 장군의 학익진에 포위돼 대패하고 이후 안골포 해전에서 가토 요시아키와 구키 요시타카 또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에 참패한 것이었는데, 와키자카 야스하루란 인물의 과감성을 부각하고, 영화적 재미를 높이기 위해 역사적 사실을 가공한 것이다.

2)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는 견원지간이었는가?

김성균이 연기한 가토 요시아키. 과격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진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김성균이 연기한 가토 요시아키. 과격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그려진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초반 두 사람은 ‘시즈카타케의 칠본창(賤ヶ岳の七本槍)’의 구성원이지만 매우 사이가 나쁜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등장한 시즈카타케의 칠본창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사후의 패권을 놓고 시바타 카츠이에와 시즈카타케에서 전투를 벌였을 때 맹활약한 일곱 명의 장수를 가리키는 말로, 두 사람 외에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기요마사, 히라노 나가야스, 카타기리 가츠모토, 카스야 타케노리가 속해 있었다.

이 중 가토 기요마사는 우리에겐 너무나도 악명이 높은 인물이고, 후쿠시마 마사노리도 임진왜란 때 조선에 건너와 갖은 패악질을 저질렀던 것으로 알려진 망나니다.

이 일곱 명은 어렸을 적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중과 경호를 서던 최측근들로 히데요시가 일본의 실권을 거머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즈카타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이름을 떨친 것이다.

그런데 어렸을 때부터 생사고락을 같이하고 전투에서 맹활약한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가토 요시아키의 사이가 나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고 그러한 기록도 없다.

김명곤 씨가 연기한 도도 다카토라.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김명곤 씨가 연기한 도도 다카토라.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오히려 안골포 전투에 가토 요시아키와 함께 출전해서 대패한 도도 다카토라(영화 <한산>에선 부산포 전투에 잠깐 모습을 보이는데, 유일하게 전편 <명량>에 이어 같은 배우인 김명곤 씨가 배역을 맡았다)의 사이가 역사적으로 유명한 원수지간으로 임진왜란에서도 숱하게 군공을 다툰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어쩌면 <한산>의 작가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참고해 대본을 썼을 수도 있다.

3) 안골포 해전 대신 부산포 해전이 나왔다

위의 이야기와 연결되는 사실로 이 시기 일본군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준 전투는 한산도 대첩->안골포 해전->부산포 해전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은 1592년 7월, 3차 출전 때 벌어진 전투이고, 부산포 해전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592년 9월, 4차 출전의 일인데 한산도 대첩과 안골포 해전을 합치면서 부산포 해전을 당겨버렸다. 영화적 재미를 위한 생략과 극적 허용으로 볼 수 있지만, 어쨌든 역사적 사실을 바꾼 것이 맞다.

2. 영화 속 등장한 왜장들에 대한 소개와 후일담

1) 와키자카 야스하루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영화 <한산>의 진짜 주인공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비중이 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우리에게 5만 대군을 2천의 병력으로 격파한 용인 전투의 맹활약(반대로 대한민국 역사상 3대 졸전으로 꼽힐 정도다)과 함께 이순신 장군에게 번번이 패배한 장군으로 유명한데 일본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영지는 극중에도 등장하는 아와지(淡路)라는 곳으로 겨우 3만 석(일본은 석고제(石高制)라고 해서 해당 영지의 쌀생산량을 산출해 국력과 병력 동원력을 추산한다. 보통 100석당 2.5명을 동원할 수 있는 것으로 환산)의 소영지였고, 중세에는 해적들이 점거했던 지역이다.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이순신 장군과의 해전에 출전한 데에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고 용인 전투에서 엄청난 전과를 거뒀다고 해서 그에게 커다란 보상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다.

칠본창 중에서 거의 비중이 없는 세 명보단 낫지만 상위 세 명에 비하면 쩌리에 가깝다. (출처= 유튜브 채널 아케치)
칠본창 중에서 거의 비중이 없는 세 명보단 낫지만 상위 세 명에 비하면 쩌리에 가깝다. (출처= 유튜브 채널 아케치)

한산도 해전에서 대패한 후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무인도로 도망가 10일간 미역을 먹으며 살아남았고 이후 이 사실을 자신의 자서전에 썼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도 이때의 패배를 잊지 않도록 매년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날에는 미역을 먹는 풍습을 남겼는데,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미역좌’라는 별명이 붙었다.

항간에는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자도 가장 미운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좋아하는 이도. 흠모하고 숭상하는 자도 이순신이다. 가장 죽이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며, 차를 함께 마시고 싶은 자 또한 이순신이다’라는 글을 남겼다는 루머가 돌아다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고 ‘나는 성급했고 적장은 침착했다. 나의 전술은 단순해 그의 전술은 치밀했다. 나는 적장 앞에 꼼짝할 수 없었다.’라는 기록을 남겼다고 한다.

세키가하라 전투 병풍도.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세키가하라 전투 병풍도. 엄청나게 큰 규모의 전투였음을 알 수 있다. (사진=인터넷 커뮤니티)

임진왜란 후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크게 활약한 전투가 바로 이후 일본의 300년 운명을 결정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다.

이 전투는 온 일본 열도가 친도요토미 세력과 친도쿠가와 세력으로 나뉘어 세키가하라란 평원에서 일대 회전을 벌인 전투인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친도요토미 세력인 서군으로 출전했다가 도도 다카토라의 회유를 받고 다른 3명의 다이묘들과 함께 서군을 배신함으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승리하는 데 크게 공헌한다.

이때의 공헌 덕분인지 이전 영지에 비해 석고가 거의 두 배에 가까운 1609년 5만 3천의 이요국 오즈번으로 이봉되고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이 보전된다.

2) 가토 요시아키

가토 요시아키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가토 요시아키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영화 <한산>에선 괜히 흥분해서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자신의 전선을 빼앗긴 바보로 나오는데 실제로 그렇게 멍청한 다이묘는 아니었다. 비록 출전한 해전마다 이순신 장군에게 번번이 패배하지만 그것은 다른 다이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칠천량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긴 했으나 원수지간인 도도 다카토라에 미치지 못했기에 더욱 사이가 나빠졌고, 울산성에 갇혀 있던 가토 기요마사를 구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와중에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의 무단파들은 이시다 미츠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의 문치파들과 대립하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에 가까워진다.

세키가하라 전투 때 후쿠시마 마사노리,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동군에서 활약했고, 이때의 공을 인정받아 이요 20만 석에서 아이즈 80만 석으로 이봉됐으나 아들대에 대폭 깎여서 2만석의 소영주로 전락한다.

3) 구키 요시타카

구키 요시타카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구키 요시타카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그는 해적 출신 다이묘로 임진왜란에 출전한 일본군 중 최고의 해전 전문가로 꼽혔다. <한산>에선 어리석게 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빼앗긴 것으로 묘사된 거함 니혼마루를 건조했는데 이 배는 함포 3문을 장비하고 있고 당시 일본배 중 가장 큰 배 중 하나였다.

물론 그 또한 이어진 안골포 해전에서 처참하게 패배했는데 이 와중에 니혼마루를 방벽으로 삼아 부하들을 구조했고, 니혼마루는 끝까지 침몰하지 않고 버텼다고 한다.

임진왜란 후 구키 요시타카는 아들 모리타카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거하는데,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자신은 서군, 아들은 동군의 편에 서는 일이 벌어진다. 전투 후 모리타카가 탄원하여 아버지를 목숨을 살리는 데 성공하나 이미 낙망한 요시타카는 자살한 후였다.

4) 도도 다카토라

도도 다카토라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도도 다카토라 초상화. (사진=위키피디아)

전편에 이어 유일하게 두 번 연속 같은 배우가 출연한 도도 다카도라는 일반 보병인 아시가루(足軽)에서부터 시작해 32만 석의 다이묘의 자리에까지 오른 몇 안 되는 인물로 10번이나 주인을 바꾼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한번 섬긴 주인에겐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일했기 때문에 전 주인으로부터 감사장이나 추천장을 받고 나와 새로운 주인에게 갈 정도였다고 한다.

다양한 다이묘를 섬기며 전국을 유랑하던 도도 다카토라는 1576년 히데요시의 동생인 하시바 히데나가를 만나 정착하면서 출세하기 시작하고, 차근차근 영지를 늘려간다.

임진왜란 때는 이순신의 첫 출전이었던 옥포 해전부터 패배를 당하며 안골포 해전까지 계속 패배하다가 원균을 상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큰 공을 세우지만, 다시 명량해전, 절이도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대패한다.

임진왜란 이후, 이제 그는 떠오르는 권력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붙어 그의 손발 노릇을 충실히 하며 유력 다이묘들을 도쿠가와 진영으로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세키가하라 전투 때는 전술한 대로 와키자카 야스하루 등 네 명의 소 다이묘들을 회유해 배신시킴으로써 동군이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다.

그 공헌 덕분에 이요 이마바리의 32만 석 대영주가 되고, 메이지 유신 때까지 가문을 유지한다.

3. 결언

필자가 일본 전국시대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어릴 적 방영했던 <조선왕조 500년- 임진왜란>편을 보고, 그 후 김성한 작가의 <7년 전쟁>을 읽은 후, 게임 ‘삼국지’ 시리즈의 제작사 고에이가 만드는 ‘오다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를 재미있게 하다가 '이 게임에 나오는 일본군 장수들은 어떤 이들일까?'가 궁금해 관련 자료와 소설을 찾아 읽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시작된 관심과 흥미가 이 글을 쓰기에까지 이르렀는데, 이 글이 영화 <한산>을 재미있게 본 이들이나, 앞으로 볼 이들에게 약간의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혹여 '민족적 원수 같은 녀석들의 후일담 따위 알아서 뭐 하냐?'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말이다.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일본에게 번번이 당한 것은 일본에 대해 너무 무지했고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키 작고, 못 생기고, 음란하고 간사한 족속들, 지들이 발전했으면 얼마나 발전했겠어?' 그런 안이한 생각으로 대처하다가 여러 차례 침략을 당했고, 결국엔 국권을 빼앗기고 35년간 식민 지배를 당하는 민족사상 최악의 수모를 겪고 말았다.

세계 최고의 병법서로 불리는 <손자병법>의 가장 유명한 구절이 바로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란 말이다. 일본이란 나라와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에겐 불구대천의 원수이지만 또한 가까운 나라와 그 국민들이다. 그들에 대해 제대로 알고 미리미리 대비하지 않는다면 언제고 또다시 커다란 국가적 불행을 겪을지 모른다.

위 왜장들의 후일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저들 사이에서 배신과 변절이란 처세의 수단일 뿐, 그다지 어렵지도, 지탄받을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이 민족적, 국가적 속성이다. 이 점을 부디 잊지 말고 현대를 사는 우리뿐 아니라 후손들도 일본을 상대하고 대비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는 친일, 반일 논란을 뛰어넘어 극일, 용일해야 하는 시대다. 그리고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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