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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원리뷰] '터크 애버래스팅'(2002)에서 나타난 삶의 진정한 의미

[더원리뷰] '터크 애버래스팅'(2002)에서 나타난 삶의 진정한 의미

  • 기자명 장용희 시민기자
  • 입력 2022.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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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뉴스더원=장용희 시민기자] 우린 모두 한 번쯤은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살아가면서 주변인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적도 있겠다. 이처럼 100여 년도 안 되는 짧은 인생에 좋은 일도 있지만 힘든 일도 있기 마련이다.

추억이 되어버린 옛 기억들을 회상하면서 노년에는 행복하게 쉼을 가지며 살아가려 노력한다. 죽음을 맞이하기 전 사람들은 무언가를 이루려 한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정부는 인구수가 늘어나지 않기 위해 산하 정책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죽음에 대하여 두려울 게 없기에 원하는 것을 다 해보며 노력하지 않으면서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존재로 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도덕적인 법률체제가 의미가 없어지고 자유분방하게 자신의 분노를 표현할 것이며 우주선을 타고 저 멀리 날아가 다른 행성으로 가거나 또 다른 분란을 일으켜서 외계물질과의 교신으로 점차 지구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지구가 멸망하여도 사람들이 죽지 않아서 숨쉬기 힘든 고통 속에서도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이 생길지도 모른다. 이처럼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 은 삶의 의미와 죽음이 없는 영생이 의미가 있을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며, 진중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 고민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죽음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것이며, 짧은 생을 살거나 긴 생을 사는 것에 상관없이 인류는 모두 죽음이라는 선물을 갖게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영화 속 15세의 위니 프레드 포스터(알렉시스 브레델 분)는 강압적이며 엄격한 가정 속에서 성장한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펜스 포드의 명문인 미들하우스에 보내려는 부모님에게 반항하며 집을 뛰쳐나온다. 청소년기 때 겪는 흔한 부모님과 청소년기 자녀들이 대화하는 장면도 나온다.

“좋은 교육을 받아야 사회에서 대접을 받는단다.”

명문 미들하우스를 보내려는 19세기의 현시대의 부모의 모습은 지금의 학벌주의 시대의 상황과 전혀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사회에서 대접을 받으며 곱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딸을 생각하며 말하지만 딸 입장에서는 답답하게 살아가야 할 끔찍한 고통에 대해 전혀 알아주지 않아 혼자 당해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강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거긴 끔찍한 곳이에요. 다들 그래요. 감옥이나 다름없다고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학교 출신들은 우아함을 겸비한 품위 있는 여성들이야. 넌 그런 게 부족하잖니.”

엄마는 딸의 자유분방하고 활발한 성격을 이해해 주지 못하고 본인의 기준에서 딸을 평가하며, 딸은 이에 대하여 반항한다. 하지만 아빠도 한몫 거든다.

“위니프레드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

아빠는 딸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전혀 딸의 입장은 생각해 주지 않는다.

“전 가지 않을 거예요! 그런 고상한 타입 체질이 아녜요!”

엄마와 아빠의 고집에 딸은 그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다. 한 번쯤은 답답한 굴레에서 벗어나 가출하고 싶어 했던 청소년기를 겪어보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딸의 입장이 이해가 되면서 쉽게 영화 속에 여주인공이 되어 더욱 영화 속에 빨려 들어갈 수 있었다. 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영화가 주는 마지막 결말이 더욱 궁금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공감 매개체가 등장한 것이다.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집을 뛰쳐나와 길을 잃고 헤매던 위니 프레드 포스터는 나무에서 솟는 샘물을 마시는 소년 제시 터크(조나단 잭슨 분)를 만나게 된다. 샘물을 마시려는 위니 프레드 포스터를 제지하는 제시 터크, 독이 들었다며 말한다. 하지만 샘물을 맛있게 먹고 있던 제시 터크를 보았기에 똑똑한 위니 프레드 포스터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이를 가정하여 보면, 소녀 위니는 결코 남의 기준에 의해 본인의 의견을 결정당하는 체계를 싫어하는 성격임을 알 수 있다. 즉, 자신이 판단하는 기준으로 살아가는 당당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지혜로운 소녀 위니에게 첫 번째 위기가 닥친다.

소년 제시의 형, 마일즈가 소녀 위니를 말에 태워 집에 데려간 것이다. 위니는 집으로 보내달라고 말하지만 편안하게 대해주며 자유롭게 살아가는 터크 가족의 모습에 동화되어 집에 가기 싫어한다.

그들이 돈을 목적으로 납치한 게 아님을 알게 되었기에,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위니는 이 집에서 평온한 삶을 원하는 대로 누리게 된다. 소박하지만 따뜻한 가족, 소녀 위니가 원하는 가정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만약, 위니의 가족들도 이 들 가족처럼 욕심을 버리고 따뜻함 속에서 자유롭게 딸을 풀어주었다면 무조건 온실의 화초로 키워야 성공한다는 부모의 목표 지향점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상을 펼치며 리더형 여성으로 성장하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부모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만 아이의 인생을 잡아주려는 잘못된 사랑의 방식이 있었기에 영화를 통해 비판의식을 찾아볼 수 있었다. 계속하여 성장하는 아이들을 본인의 기준으로 양육한다면 자신이 정한 기준점에 도달할 수는 있지만 원하는 방향대로 살지 못하는 아이가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서로 사랑하지만 때때로 남보다 슬픈 사연들이 존재하는 것이 바로 가족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양육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미리 겪어본 험한 세상에서 아이를 위해 아이가 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기에 아이에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아이는 부모의 심정까지는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부모가 된다는 것과 아이로써 살아가는 것 모두 힘든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고 살아가고 있다. 

자연의 섭리 속에서 2세를 가지고 2세는 또 3세를 가지면서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노년기를 거쳐 죽어가는 가족의 모습. 지금도 19세기에도 풀 수 없었던 부모와 자식 간의 복잡한 관계를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

소녀 위니와 소년 제시는 17세의 나이에 맞게 순수한 사랑을 서로 하게 된다.

“이대로 시간이 영원히 멈춰졌으면 좋겠어.”

소녀 위니가 시간이 영원히 멈춰졌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소년 제시에게 고백을 하자 샘물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영생을 얻게 해주는 샘물이란 거대한 비밀을 말이다.

“위니 내 말 들어봐. 우리가 처음 만났던 큰 떡갈나무 기억나? 내가 물 마시고 있던 작은 옹달샘도? 난 영원히 살 수 있어. 변하지 않는다고.”

이때 터크 가족을 쫓는 남자가 가출한 소녀 위니를 찾게 해준다며 샘물이 있는 산을 달라는 빌미로 위니가 있는 터크 가족을 찾게 된다. 수상한 남자는 늘 노란색 양복을 입고 있는데, 노란색은 경고의 의미를 갖기도 하다.

축구 시합에서 심판이 옐로카드를 꺼내드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원작 ‘트리갭의 샘물’을 쓴 작가 나탈리 배비트의 섬세한 캐릭터 설정이 돋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영생을 얻게 되는 샘물의 비밀을 우연히 듣게 된 노란 양복을 입은 남자는 샘물을 사람들에게 팔아 부자가 되려는 마음과 자신도 영생을 얻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욕심을 부린다.

현시대를 살아가는 물질주의 시대를 대변해 주는 장면이다. 남자는 결국 죽는다. 왜일까? 터크 가족은 영생의 샘물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에 널리 알려 부와 명예를 축적하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정되어 있는 샘물의 양으로 인해 분명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많은 사람들이 죽게 되고, 영생을 얻는 사람들에 의해 잘못된 가치관이 전달될 수도 있으며 인생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게 되며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순수한 터크 가족은 결코 자신들의 욕심으로 영생의 샘을 이용하지 않았기에 아마 하늘에서 터크 가족에게만 보여주었던 것은 아닐까?

젊음을 유지하는 터크 가족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며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손가락질 받으며 떠돌아다니는 유랑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자연의 섭리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깨트리지 않으려는 터크 가족은 우리가 삶은 처음과 끝이 있기에 진정한 삶을 살아간다는 소중한 삶의 의미를 알려주었다.

가장 인상 깊이 남았던 대사는 터크 가족을 책임지는 아버지 앵거스 터크가 호숫가의 배 위에서 소녀 위니에게 말하는 부분이었다.

“우리 가족이 사는 건 사는 게 아니다. 우리는 단지 강가에 틀어박힌 바위 같은 존재지.”

앵거스 터크의 말에 소녀 위니는 질문한다.

“죽고 싶지 않은 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앵거스 터크는 대답한다.

“그렇지 않아. 인간은 죽게 마련이다. 그게 자연의 섭리란다. 새 생명의 탄생도 마찬가지야. 죽음 없인 삶도 없는 거란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마라 위니야. 삶이 아닌 삶을 두려워해라.”

영생 샘물을 팔아서 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부를 축적할 수 있음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위해 탐욕적이게 살아가지 않고 자신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고 살아가는 터크 가족의 순수함은 영생은 헛된 욕망임을 깨닫게 해준다.

9미터 나무에서 정면으로 떨어진 소년 제시와 방울뱀에 물려도 죽지 않는 아버지 앵거스 터크. 총에 맞아도 죽지 않는 불사신 가족들은 소녀 위니에게 총을 겨누며 산의 영생의 샘을 안내하라고 강요하는 노란 양복의 남자를 죽이면서 터크 부인은 교수형에 처하게 된다. 터크 부인을 구하기 위해 아들 제시 터크는 아이디어를 내고, 형과 소녀 위니와 함께 구출해낸다.

선의적인 거짓말로 터크 부인을 구출해야만 했던 일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나쁜 의도를 가지고 거짓을 고하는 것과 선의를 가지고 하는 거짓말과 범인을 죽여야만 하였던 터크 가족의 행동이 과연 선과 악의 기준에서 어떠한 잣대로 바라보아야 하는지 생각해 주게 된다.

사회적으로 보았을 때에는 악한 자들의 소수의 멸망은 선한 자들의 피해를 보지 않으며 사회는 선순환을 하게 됨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신이 터크 가족에게만 인생의 깊이를 이해하게 해줄 수 있도록 해준 고결한 선물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는 영생의 샘이 마른 채로 나무 밑에 잠든 소녀 위니의 비석을 보여주니 말이다.

영생의 샘을 알면서도 먹지 않았던 소녀 위니, 큰 사건들이 마무리가 되고 집에 돌아와서 할머니의 죽음으로 아파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영생의 샘에 다다른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과연 소녀 위니는 어떻게 죽음을 선택하였을까.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터크 부인과 자신을 사랑해 주는 소년 제시를 생각하면서 마시려 하지만, 강어귀에 틀어박힌 바위 같은 존재라며 영생이 행복한 삶이 아님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소년 제시의 아버지 앵거스 터크의 말을 기억하면서 깊게 고민한다.

100여 년 뒤 찾아온 소년 제시는 영생을 택하지 않고 죽은 그녀의 묘비를 보게 되고 자연의 섭리로 뜻있게 살아간 위니의 일생을 알게 되면서 영화가 끝난다. 우리는 늙지 않기 위하여 가끔 투자를 한다.

필자의 경우 서민적으로 살고 있기에 비록 큰 투자는 못하지만 자기 전에는 아이크림을 바르면서 얼굴의 주름 정도는 걱정하고 있다.

사람들은 주어진 삶의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이루고 죽음을 맞이하려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노력에 대한 결과를 받지 못하였을 때는 신을 원망하면서 절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내 다시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가게 된다.

모두 인생을 돌아보며 후회하고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되며 그렇게 점점 어른이 되어간다. 인생의 일대기에서 후회하지 않는 완벽한 삶을 사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슬픔이 존재하기에 작고 기쁜 일에도 감사하는 인생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소녀 위니의 선택은 참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이미 영생을 겪어본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을 것이다.

만약 영생으로 사는 가족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무조건 영생의 샘물을 먹어서 자주 찾아오는 인생의 고통들을 감내하면서, 지겨워도 살아가야 하는 끔찍함을 알려주는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본성과 성격을 서로 모르기에 알아가며 겪는 인생의 순환과정을 여러 차례 겪으며 사회 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이기에 타인들은 모두 몸만 큰 아이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참 서글플 것이다. 남들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사회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객들 중에 주인공 위니와 다르게 영생의 샘물을 마시고 싶다는 의견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 유튜브 채널에서 이 영화를 각색하여 줄거리를 들려주는 영상의 댓글을 보게 되었다.

과연 네티즌은 어떤 결정을 내렸을까. 영생의 샘물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마시지 않을 것일까. 많은 갑론을박이 있었지만 예상대로 영생의 샘물을 마시고 싶다는 의견이 과반수이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삶에서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 때문일 것이다. 마치 영화 속의 소녀 위니가 되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인가 생각하여 내린 결정은 아마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목적을 알게 해주는 질문이 될 것이다.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필자는 세계 평화를 오랜 시간 동안 꿈꿔왔기에 영생의 샘물을 마실 것이며,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영생의 샘물을 없애버릴 것이다. 그리고 터크 가족처럼 숨어살면서 신께 지혜를 구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읽고 빠르게 평화로운 지구를 만들어가는데 일조를 하고 싶다.

그렇지만 끊임없는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영생의 삶으로 인하여 세계 평화가 다다를 때쯤이면 정신병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을까. 그래도 나 혼자만의 희생으로 세계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시간을 멈출 수 있는 영생의 샘물은 지구상에 절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임에도 없는 것은 신께서 이길 수 있는 고통을 주시기 때문임이 아닐까. 만약 이길 수 없다면 신이 주는 고통이 아닌 악마가 주는 나쁜 짓일 것이다. 우리는 왜 고난을 받으면서 살아가야 하며 결코 절대 만족을 하지 못하는 인생 속에서 희로애락을 겪어야 하는가?

이에 해답을 찾지 못하면 우리는 신께 원망을 하며 신을 배척하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 보았는가? 죽음은 또 다른 선물이자 삶을 귀하게 여기게 해주는 척도임을, 죽음을 두려워하는 우리의 삶도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죽음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임을 생각하게 해주는 것도 살아가면서 죄를 짓는 것과 죄에 대한 무게를 결정해야 하는 우리의 잘못된 선택에 의하여 회개를 해야 하는 이유도 알게 해준다.

이 글을 읽는 분들도 평생 보아야 하는 것이라고 추천하고 싶은 인생 영화가 한 편씩 존재할 것이다. 나에게 <터크 애버래스팅> 은 인생 영화 중에서 손꼽히는 영화였다.

더 재미있고 감동을 주는 진한 영화도 있지만 인생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해주는 영화는 역시 <터크 애버래스팅> 이였다.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 의 네이버 포털사이트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9.10점이었다. 전체관람가이기에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만족도 평가에 응해주었다.

영화를 제일 재미있게 본 연령대는 10대였다. 그리고 4, 50대는 거의 만점에 가까운 평가를 해주었다. 2, 30대의 젊은 층은 순수한 터크 가족의 일가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수 있기에 결말에 대하여 약간의 불만을 가진 일부 층들에 의해 낮은 점수가 매겨졌을 수 있었을 것이다.

10대의 경우 아직 순수한 열정이 남아있기에 소녀 위니가 되어 위니의 영생을 거절하는 당당한 결정에 대하여 박수를 보낼 수 있기 때문임은 아닐까? 4, 50대의 경우 아버지 앵거스 터크가 되어 자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이 모두 담겨있기에 인생의 참의미를 알게 해주는 이 영화를 높게 평가하였을 것이다.

각양 각색의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 은 인생의 깊이를 알려줄 수 있는 멋진 영화였다.

특히 디즈니의 뛰어난 영상미는 영화의 만족도를 높여주는 역할을 하였다. 자연 속에서 사는 소녀 위니가 되어 떠나는 여정, 이 속에서 펼쳐지는 감동과 설렘은 인공적이지 않은 색채감을 보여주는 숲에서 촬영을 했기에 광활한 대지가 주는 편안함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로 결코 마음이 크게 혼동되거나 동요되지 않으면서 볼 수 있었다.

인생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 은 깊은 영감을 주며 날 찾아왔고, 곧 집을 뛰쳐나가서 숲속으로 향하는 소녀 제시의 자유로운 마음을 닮은 반짝이는 날개를 펼쳐 큰 세상으로 날아갔다.

지금도 굶어 죽어가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에게 이 영화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원하는 예비 천국인들을 만들어주는 이 영화의 화려하고 비상한 날갯짓에 현시대의 공존의 기쁨을 느끼었다. 세계 평화에 앞장서는 청소년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확신도 가지게 되었다.

투영한 자연 속에서 함께 관객들과 숨을 쉬면서 나아가는 매력과 풋풋한 10대의 사랑 이야기는 영화의 감칠맛을 더해준다.

소년 제시는 자고 있는 소녀 위니를 깨워 에펠탑을 보러 가자고 한다.

“에펠탑 보고 싶지 않아? 오늘 안에 말이야.”

“저게 에펠탑이라고?”

현재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는데 저 멀리 파리의 에펠탑을 보러 가자는 엉뚱한 소년 제시를 따라서 집 밖으로 나간 소녀 위니는 진짜 에펠탑이 아니라 절벽을 올라가서 보이는 풍경을 함께 보자는 것을 알게 된다. 정상에 오른 소년 제시가 말한다.

“내겐 저것이 파리야.”

그리고 폭포로 가서 소년 제시가 뛰어내린다. 소녀 위니도 겁을 먹다가 용기를 내어 폭포에서 뛰어내리자 소년 제시가 말한다.

“내가 잡았으니 걱정 마. 널 놓는 일은 절대 없을거야.”

소녀 위니는 소년 제시를 의지한 채 두 팔을 벌려 날개를 펼치듯 자유롭게 유영한다. 영화에서 제일 귀한 명장면이 탄생된 것이었다. 이렇듯 순수한 터크 가족과 함께 영원히 변치 않는 여운을 가져다주는 이야기를 88 분 동안 보다 보면 영화의 이름처럼 빛나는 장면들을 하나둘씩 마음속에 간직하게 된다.

사실 소년 제시는 104살이다. 하지만 17살인 소녀 위니와 함께 어울리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그건 아마 본인의 모습이 17살의 소년에서 멈춘 것도 한몫할 테지만 가족들에게 여전히 17살의 아들의 역할을 해왔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우린 여전히 겉모습이 어리면 어리게 보고, 겉모습이 나이가 들면 나이 있는 사람으로 본다. 외향적인 모습을 전부 부정할 순 없겠지만,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나이가 든 환경이라면 환경에 동화되어 나이가 든 어른처럼 행동을 한다. 또한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나이가 적은 환경이라면 아무리 나이가 적지 않아도 어린 행동을 하게 된다.

이를 통하여 사회적인 시선과 영향은 본인의 생각과 가치관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을 영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타인에 의하여 삶을 살아가는 현재의 모습이 많이 있다면 자기반성과 자아 성찰을 통해 변화시켜야 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타인에 의하여 지배당하지 않는 삶, 타인의 결정에 의하여 결정되지 않는 삶을 살려면 가치관의 기준이 네가 아닌 나여야만 하는 것이다.

삶을 깊이 있게 바라보는 사념의 시간을 허락해주고 온전한 나만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 은 공존에 대한 아픔의 치유와 죽음의 두려움까지 치유될 수 있는 영화치료 목적으로 상영되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 홈페이지 내 학회장 인사말 메뉴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이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가 한 말에 의거하여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은 이미 영화가 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영상과 영화는 이제 필수품이고 필요적 기제이기에 어딘가에 티핑 포인트가 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열과 성을 다해 추진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한 편의 영화를 만들며 살아가기에 가장 공감이 되고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 중 티핑포인트를 찾아 우리의 치유 목적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평론을 쓰면서 죽음은 인생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해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영화에서 나쁜 악당이 죽는 장면을 통해서 결국 악은 선을 이길 수 없다는 신념을 더욱 견고하게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어느새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 은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잊을 수 없이 되새겨지는 신비스러운 터크석 브로치가 되어 나만이 볼 수 있는 고귀한 보석으로 가슴 위에 뗄 수 없게 단단히 붙어 있었다.

그 터크석 브로치를 떼어보니, 터그 가족이 살던 작은 오두막집이 숨어있던 울창한 밀림을 닮은 짙은 녹색과 소년과 소녀가 뛰놀던 폭포수의 맑은 물빛이 담긴 청색, 그리고 서툴지만 따뜻한 부모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던 위니 가족을 닮은 노란색이 함께 빛나고 있었다.

글을 읽는 당신에게 있어 인생의 의미를 전해주는 영화는 무엇이었는가. 인생은 어떤 거야라고 단정 지어주는 말보단 당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뤘을 때의 가상의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아주는 영화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모든 욕망을 이뤄 욕심들이 버려진 당신과 맞이한 거울 속에 있는 진정한 당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2년에 제작된 영화 <터크 애버래스팅>은 영화의 이름처럼 시공간을 초월하여 2021년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2022년에도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주는 공허함 속에 빨려 들어가 진정한 삶의 방향성을 잡아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자. 영화의 관람객이라면 터크 가족이 되어 영원한 삶을 누려보았을 것이기에 영원한 삶은 이미 살았다고 가정을 하는 것이다.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은 부와 명예, 권력 중에 하나이다.

만약 당신이 세상에서 제일 말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 최고의 CEO가 되어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는 영화라면 과연 행복할까? 아니면 세계 최고의 대통령을 뽑는 제도가 생겨서 세계를 다스리는 대통령이 되어서 권력을 갖게 되면 과연 행복할까?

혹은 인공지능보다 더 앞선 지식으로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는 초능력적인 지능을 가지고 모든 지식을 알아서 세계 최고의 권위 있는 학자로 명예를 얻게 된다면 행복할까?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경험을 완벽히 수행해 내지 못하고 대부분 죽는다. 완벽한 인생을 살지 못해 슬프다면 당신만 슬플 것이다. 신이라면 모를까. 결국 우린 사람이기 때문이다.

만약 신이 아니어도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요술 구슬이 있다고 가정 하였을 때 과연 모든 것을 이룬 것일까? 개인적인 의견은 이렇다. 앞에서 보이고 느껴지고 만족을 얻는다고 해서 타인의 만족은 생각하지 못하게 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한다면 결코 이기심으로 타인의 마음까지 가지지는 못할 것이라고.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늙지 않는 터크 가족에게 횃불을 던지며 동네에서 내쫓는 사람들처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떠도는 외톨이 마술사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세상엔 비밀이 없기에 비밀을 밝혀질 때마다 사람들은 언성이 높아지고 말씨가 불씨가 되어 마음속에 화르르 타오르는 불꽃으로 가슴이 타들어가기도 한다. 한두 마디의 말로 인하여 깊이 상처를 받아 외로워질 때도 있고 고립되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이 영생이라는 선물을 가진다면? 마치, 성경에 나오는 독사과처럼 영생을 얻은 사람들은 우왕좌왕하며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서로의 할 일을 미루다가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아닌 무자비한 세상으로 변할지도 모른다.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신의 한수’ 라는 단어는 그냥 나온게 아닌 듯 싶기도 하다. 급작스러운 상황에는 도움이 필요할 때 누군가가 해답을 찾으면 신의 한수라고 말한다.

하지만 신께서는 한수만 둘까. 신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 극소수의 작은 한 점을 하더라도 사람은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광활한 우주 속에서 작은 점인 지구에서 태어나 더 작은 사람으로서의 인생을 살아가기에 아직 우리는 더 많은 지식과 지혜가 부족하여 서로 다투고 싸우는 것이 아닐까?

개인적인 견해로는 지금 우주인이 나타나면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본성과 미래를 보는 통찰력을 겸비한 작가와 감독이 이뤄낸 이 영화에 대하여 모두 신념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확장시킬 수 있도록 함께 노력해야만 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절대 다른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으며 신념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혜로운 터크 가족처럼 살아갈 때에만 비록 힘든 인생길에서도 진정으로 원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를 관망할 때 가족에 대한 일에 대하여 힘든 점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 수 있는 장면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집에서 가출한 소녀 위니가 터크 가족이 사는 오두막집에서 살고 있을 때의 일이다. 노란색 양복을 입고 터크 가족의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남자가 포스터 일가를 찾아가 산을 넘겨주는 대신 딸을 찾아주겠다며 거래를 제안하는데 이로 인해 큰 재산인 영생의 샘물이 있는 숲에 관한 땅문서를 넘겨준다.

딸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방법도 가리지 않고 전 재산을 빼앗겨도 될 정도로 사랑하는 부모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이라도 혈연이라는 끈은 단단하게 묶여있는 듯 풀어지질 않는다. 타인이 주는 상처보다 가족이 주는 아픔이 더욱 크게 남는 이유는 이런 이유와 같을 것이다. 가족이기에 거침없이 말하고 숨기지 않기 때문에 결국 남보다 서로를 미워할 수도 있는 현실이다. 가족은 가족대로 힘들지만, 가족이라는 산을 넘어 더 넓은 세상을 바라보고 거침없이 걸어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집으로 돌아온 소녀 위니에게 위니의 엄마가 위니를 안아주며 말을 한다.

“엄마의 귀여운 딸로만 남아주렴.”

가출한 자신을 헌신적으로 찾는 부모님의 마음을 알게 된 소녀 위니는 정말 엄마의 말대로 귀여운 딸로 남아 한 평생 여자다운 인생을 살아간다. 엄마의 말을 거역하지 않고 위니의 비석 문구대로 ‘사랑스러운 아내이며 어머니’로 한 평생 살다 죽어간 것이다. 단지, 부모님의 큰 사랑을 느낄 수 없었기에 작은 말에도 상처를 받아 멍든 가슴을 포근하게 안아준 부모님의 사랑에 굴복한 위니.

현시대처럼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제안하고 협조해주는 사회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돈만 좇는 노란 옷의 남자도 보았으며, 영생의 슬픔을 간접적으로 겪고, 땅을 넘기기까지 한 부모님의 진정한 사랑을 느꼈기에 자신이 고결하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가족의 바램대로 살아간다.

 

“흙에서 났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영화 하반부에는 소녀 위니의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목사님이 이렇게 읊어주며 장례를 치른다. 장례식의 여러 의례 중에서 이 장면을 중점적으로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진=월트디즈니)
(사진=월트디즈니)

이 영화는 한 마디 한 마디 모두 적어서 읽어야 할 정도로 심중이 깊다. 흙에서 난 사람이기에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기독교적인 사상이다. 그리고 정말 사람은 흙에서 난 자연으로 생성된 개체물이며,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짧은 사건을 통해 인생의 가치를 일찍 알게 된 소녀 위니는 죽음도 두렵지 않기에 높은 곳에서 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지고 인생을 꾸려갔을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이처럼 아름다워야 한다. 그렇게 노력할 때 비로소 자신만의 희소성을 찾게 된다.

이것을 일명, ‘꿈’이라 말한다. 꿈만 꾸는 사람이었는지, 꿈을 이루려 노력하는 사람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다시 한번 영화를 돌려본다면 보여지는 신체가 아닌 진짜 내 안의 마음의 둘레와 마음이 향하는 발걸음을 돋보기로 면밀히 파악하게 되는 나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늘 밤, 영화 한편 보고 싶다면 강력하게 추천한다. <터크 애버래스팅> 을 말이다. 네이버나 구글 포털사이트에 ‘영생 영화’ 라고 검색하여 인생을 다룬 다른 영화들도 골라서 보는 것도 제안하고 싶다. 우리 모두 영생하는 삶보다 더 값지고 귀한 자신만의 삶을 살 수 있는 시간의 선순환을 만들어가는 소녀 위니처럼 살아보기로 약속하자. 지문으로 도장을 날인하여 찍어주는 것은 잊지 말길 바란다.

어떻게 도장을 찍냐고 물으신다면? 지금 당장 숲에 숨어있는 영생의 샘물을 찾아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도장을 만들어 전해드리고 싶다. 아마, 서로의 성장 과정을 볼 수 있는 기나긴 여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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