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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일본 국보 칠지도, 제작지는 백제 어디인가?

[기획] 일본 국보 칠지도, 제작지는 백제 어디인가?

  • 기자명 박두웅 기자
  • 입력 2022.07.18 14:43
  • 수정 2022.07.18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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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곡산(谷山), 전남 곡성(谷城), 서산 지곡(地谷), 충북 충주 칠금동(漆琴洞)...

충남 서산 지곡면 도성리 칠지도 야철기념비. (사진=박두웅 기자)
충남 서산 지곡면 도성리 칠지도 야철기념비. (사진=박두웅 기자)

[뉴스더원 충남=박두웅 기자] 충남 서산시 지곡면 도성3리 칠지도 야철기념비 광장에서 16일 칠지도제작기념문화제 주관으로 도성리 마을 100여 명의 주민이 모인 가운데 제13회 칠지도 도장공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칠지도(七枝刀)는 4세기경 백제에서 왜국으로 보낸 철로 만든 검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보관 중이다. 74.9cm의 양옆으로 모두 6개의 가지가 뻗은 철제 칼 표면(앞면)에 35자, 이면(뒷면)에 27자 등 총 63자의 금상감 명문이 새겨져 있는 신검으로 알려져 있다. 

제13회 칠지도 도장공 추모문화제가 16일 지곡면 도성리  칠지도 야철기념비 광장에서 열렸다. (사진=박두웅 기자)
제13회 칠지도 도장공 추모문화제가 16일 지곡면 도성리 칠지도 야철기념비 광장에서 열렸다. (사진=박두웅 기자)

박정섭 회장은 기념사에서 “서산시 지곡은 옛 지명이 삼국시대 백제의 곡나(곡나-현 지곡면 도성리)로 세계 최초 금상감기법 칠지도를 제작한 유서 깊은 고장”이라며 “서산 10경에 칠지도 마을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곡 도성리에 있는 칠지도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칠지도 이야기 안내판. (사진=박두웅 기자)
지곡 도성리에 있는 칠지도 이야기를 만화로 그린 칠지도 이야기 안내판. (사진=박두웅 기자)

이에 이완섭 서산시장은 “칠지도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신검으로 모양이 사막의 선인장처럼 일곱 가지를 가졌다. 학자들마다 칠지도 제작지에 대해 여러 이견이 있지만, 나는 우리 서산 지곡 도성리가 칠지도 제작지라고 믿고 있고, 또 그러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칠지도 제작지를 둘러싼 논란들

칠지도 모형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칠지도 모형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이완섭 서산시장이 말한 학자들 간의 이견은 대략 4곳으로 집약된다. 
학자들의 주장들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단편적인 문구에 기반을 둔 것으로 3~5세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철기 문명의 전래에 대한 나름의 견해에 기반을 두고 있다. 

칠지도 제작지라 명명한 곡나철산은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섭정 때의 기사에 나타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공황후 섭정 52년(252) 가을 9월 병자(丙子)일, 구저(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 1개, 칠자경(七子鏡) 1개, 각종 중요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이) 아뢰기를 ‘신의 나라 서쪽에 강이 있는데, (강의)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으로부터 나옵니다. 멀어서 7일을 가도 미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한일 역사학계에서는 제작지가 어디인가에 앞서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 해석을 둘러싸고 서로 해석을 달리하고 있다. 

그 견해를 요약하면 백제에서 왜에게 보낸 칠지도에 대해서 일본 학자들 일본서기 문구 그대로 해석하여 백제왕이 왜왕에게 바친 것이라는 설, 둘째, 한국 학자들은 일본서기는 시기적으로 칠지도 관련 사건 이후 기록된 역사서로 정권에 따른 왜곡이 곳곳에 나타나는 것인 만큼 당시 국제정세에 비추어 보았을 때 백제왕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셋째, 명문에 새겨진 연호를 중국 동진의 연호로 해석하여 동진왕이 백제를 통해 왜왕에게 하사했다는 설, 넷째, 기타 대등한 관계에서 백제왕이 왜왕에게 선물로 주었다는 설 등이 있다. 이중 첫 번째 설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자는 이 글에서는 칠지도에 새겨진 명문 해석에 대해서는 차지하고, 백제 어느 지역에서 칠지도를 제작하였는가에 대한 논란에 대해서만 정리하고자 한다. 

곡나철산(谷那鐵山)은 지금의 어디인가?

칠지도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신사 중 하나인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에 있다. 1874년 발굴 조사 통해 칠지도가 발굴되었다. 현재 칠지도를 보관하고 있는 곳은 본전이다. 

그렇다면 칠지도 제작지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는 어떻게 다를까.

곡나철산의 위치에 대해 일본인 학자들은 곡나와 발음이 비슷하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전라남도의 곡성(谷城) 지역이나 황해도 곡산(谷山) 지역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에 대해 국내 학자인 건국대학교 홍성화 교수도 “칠지도의 제작 시기에 대해 일본서기의 기록에만 의존하여 신공 49년(369년)에 있었던 사건의 결과로 372년 백제에서 왜로 전달되었던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는 칠지도가 왜국과 혼인 관계를 맺고 있었던 백제 18대 왕인 전지왕(腆支王)에 의해 408년 백제 왕세자인 구이신(久爾辛)의 탄생을 계기로 왜왕에게 제작, 하사되었던 것이 확실시된다”고 주장했다. 

홍 교수는 “(따라서) 칠지도가 만들어진 408년은 광개토왕 비문에 나오는 사건과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는 시기로 칠지도는 5세기 초 백제가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며 “곡나철산의 지명에 대한 비정(比定)에 대해서도 그동안 황해도 곡산, 전라남도 곡성, 충청북도 보은, 충주 등지로 논란이 많았지만, 곡나철산은 4세기 말~5세기 초 고구려와 대치하고 있던 황해도 일원에서 찾는 것이 타당하여 예성강 상류에 해당하는 황해도의 곡산, 수안 등지로 비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전통문화학교 이도학 교수는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군사적 우세를 취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지배한 광산이라는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는 것으로 곡나는 전라남도 곡성으로 백제가 남해안 일대를 장악하는 상황에서 개척한 철광”이라 주장했다.

이 교수는 “양질의 철광인 곡나철광의 개발과 관련해 당시 중요한 철광은 운송로의 용이한 개척이 전제되어야만 했다. 곡성의 곡나철산은 보성강과 섬진강을 매개로 한 후 남해안과 서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서 백제 중앙으로 공급하는 게 가능했다”며 “백제의 섬진강 유역 진출과 장악은 4세기 후반까지로 소급될 수 있어, 무녕왕 대에 이르러 섬진강 유역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백제와 대가야가 대립하게 된 것은 곡나철산의 광물 운송로의 항구적인 확보와 대외 교섭 창구의 확보라는 양보할 수 없는 긴박한 이해관계가 충돌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디지털 충주문화대전에서는 “전라남도 곡성으로 비정한 견해는 발음의 유사성 강조가 주된 논거이다. 이에 비해 사료에서 나타나는 서쪽의 큰 강과 7일의 거리를 주요 근거로 강을 따라 7일 동안 가야 하는 거리를 고려하여 한강 상류인 충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충주는 고려시대에 다인철소(多仁鐵所)가 설치되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 토산물의 첫 번째로 철을 들고 있을 만큼 철산지로 주목되는 곳”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지명에 대한 발음의 유사성과 7일의 거리를 두고 의견이 분분한 것이다. 

칠지도 제작 마을임을 알리는 비가 충남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칠지도 제작 마을임을 알리는 비가 충남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 입구에 세워져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이점에 있어 충남 서산의 경우가 돋보인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서산의 이은우 향토 사학자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하는 치리국국(致利鞠國)이 지곡에 있었다. 이곳이 백제 때 지륙현이 되고, 고려시대에는 지곡현이 되었다. 나(那)는 ‘터’, ‘땅’이라는 의미로 백제의 ‘곡나(谷那)=곡지(谷地)’며, 이 글자의 앞뒤가 바뀌어 지금의 지곡이 됐다”고 주장했다. 

또 “지곡면 도성리는 예로부터 양질의 철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지명이 ‘철동(鐵洞,쇠펭이)’이라 불리었고 철을 다루는 훌륭한 야철 기술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은우 향토사학자는 또 “(칠지도 제작) 당시 백제의 서울은 한성에 있었으므로 서방으로 하(河)를 건너 7일간 가는 ‘곡나’라는 땅은 지금의 충남 서산 지곡을 말한다”고 강조했다.

부장리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리 5호분 금동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부장리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리 5호분 금동관 (사진=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더구나 2000년대 임대아파트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충남 서산시 음암면에 위치한 부장리 고분군이 발견됐다. 부장리 고분은 한성백제기 지방 유력세력의 무덤들로 청동기시대에서 백제시대에 이르기까지 무덤, 주거지 증 다양한 유적이 발굴되었다. 출토 유물 중에는 환두대도, 초두, 도끼, 낫, 철모 등을 비롯한 다양한 철기 유물과 백제의 금동관이 발견됐다. 역사학계에서는 부장리 고분을 중국과 일본으로 떠나던 해외 진출의 요지로서의 성격일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많이 산출되는 사철들을 중앙에서 직접 통제하고 관리하기 위해 설치된 특수한 성격의 담로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칠지도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가?

일제강점기인 1935년과 1936년 2차에 걸쳐 일본인에 의해 백제 절터 중 최초로 발굴 조사가 실시되었다. 지금의 부여 궁남지 바로 옆 군수리 사지(사적)이다. 이곳 군수리에서 보물 329호인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좌상'과 보물 330호인 '부여 군수리 금동보살입상', 그리고 또 다른 백제 칠지도가 출토됐다.

부여 군수리 사적지 출토 유물들(사진=박두웅 기자)
부여 군수리 사적지 출토 유물들(사진=박두웅 기자)

하지만 현재로선 1935년 1차 발굴 조사에서 칠지도의 일부로 생각되는 유물이 출토됐다는 관계자의 기록(칠지상철기)만이 전해질 뿐 그 소재는 묘연하다. 군수리사지는 사비도성 내에 있던 사찰이기는 하지만 문헌에는 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주목할 점은 이 발굴이 칠지도가 특정한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이 아니고 백제 시대 전반에 걸쳐 제작되고 활용된 신물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神이 된 칼, 칠지도

칠지도는 백제왕이 왜왕에게 전달한 매우 정제된 외교문서다. 오늘의 우리에게 있어 '칠지도'는 무엇일까.

충남 부여군 백마강 변에 세워진 백마강국가정원 전망타워에 칠지도 기둥이 세워져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충남 부여군 백마강 변에 세워진 백마강국가정원 전망타워에 칠지도 기둥이 세워져 있다. (사진=박두웅 기자)

충남 부여군은 백마강국가정원 예정지인 백마강변에 백제 역사 너울 옛길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31m 높이의 전망 타워를 세웠다. 칠지도를 본떠 만든 기둥들이 우람하다. 

규암면 신리에 위치한 부여군의 칠지공원은 노지캠핑으로 유명하다. 전국에서 몰려든 캠핑카와 카라반으로 넘친다. 

1600년 전의 백제는, 충격을 주는 문화의 창조자였다. 우리에게는 백제인들의 문화창조의 유전인자가 흐른다, 

문화 분권은 지역 정체성 찾기로부터 시작된다. 신이 된 칼. 칠지도. 칠지도를 통해 지역 정체성을 확인하고, 문화 콘텐츠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 그것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세대의 사명이며 지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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