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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의 톡톡] ‘팔 길이 원칙’을 지키는 원칙

[이규섭의 톡톡] ‘팔 길이 원칙’을 지키는 원칙

  • 기자명 이규섭
  • 입력 2022.06.21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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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섭 언론인·칼럼니스트
이규섭 언론인·칼럼니스트

[뉴스더원] "우리 정부의 문화예술 정책의 기조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6월 12일 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과 감독상을 각각 수상한 배우 송강호 씨와 영화감독 박찬욱 씨 등 영화 관계자들을 용산 대통령실 청사 앞 잔디밭에서 만찬을 함께 하면서 강조한 말이다.

“지원도 실제 어떤 것이 필요한지 현장에서 뛰시는 분들의 말씀을 잘 살펴서 영화산업을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일이 있다면 팔을 걷어붙이고 열심히 도와드리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덧붙였다. 이 자리엔 영화계 원로 자격으로 임권택 감독과 김동호 강릉영화제 위원장도 초청됐다.

대통령 초청 만찬에 다녀온 며칠 뒤 김동호 위원장과 퇴직 기자 몇 사람이 점심을 먹으며 뒷이야기를 들었다.

김 위원장은 영화계 초청자들을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윤 대통령은 김 위원장에게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영화계에 투신하게 됐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문공부 공무원을 시작으로 차관까지 지냈고, 영화진흥공사 사장을 맡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계에 발을 딛게 됐다. 부산국제영화제를 세계적인 영화제로 키우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김 위원장도 칸영화제 초청을 받고 출국 준비를 했는데 고(故) 강수연 배우의 장례위원장을 맡게 되어 녹초가 되도록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런 몸으로 칸영화제에 참석하면 건강을 그르칠 수 있다는 주위의 만류로 불참을 통보했다.    

화제는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겠다’는 말의 어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말은 이해관계가 있을 수 있는 당사자 사이에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독립적인 입장을 가져야 한다는 ‘팔 길이 원칙(arm’s length principle)에서 나왔다.    

1946년 경제학자 존 케인스가 초대 위원장을 맡은 영국예술위원회가 ‘팔 길이 원칙’을 기본방침으로 내 세우면서 일반화 됐다. 그는 예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기초예술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며 그 전제 조건으로 내 세운 것이 바로 ‘팔 길이 원칙’이다.

이후 영국에서는 정권교체와 상관없이 문화예술 지원은 예술위원회가 맡고, 정부는 간섭하지 않는 것이 문화정책의 기본 토대가 됐다.

1992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가 팔 길이 원칙을 문화예술 분야 공약으로 처음 인용했다. 그 뒤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5년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예술위)로 바뀌면서 폭넓게 이 원칙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팔 길이 원칙’은 여전히 문화예술계 현장과는 겉 돈다. 누구는 지원되고 누구는 안 된다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대표적인 사례다.

문화예술인 명단이 작성되고 각종 지원 사업에서 정부 보조금이 차별적으로 지원되면서 예술의 공정성과 자율성이 훼손됐다. 서류, 공연, 정산 등 직간접적인 간섭의 올가미가 표현의 자유와 창작의 자유를 옭아매는 요인이다.

간섭의 여지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간섭을 없애고 제약을 풀어주는 것만이 ‘팔 길이 원칙’을 지키는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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