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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더원 특별기획] 도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⓻

[뉴스더원 특별기획] 도시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 ⓻

  • 기자명 강진갑
  • 입력 2022.05.11 15:10
  • 수정 2022.05.12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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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 강진갑의 시선 ⓶ “광화문 광장에서 만나는 조선시대”

강진갑 객원논설위원,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강진갑 객원논설위원,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뉴스더원]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광장이다. 그 중심에는 조선왕조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지금 광화문 광장은 공사 중이다. 땅 속에 묻혀 있는 조선왕조 행정관청이었던 의정부와 육조 등의 관아를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발굴과 복원 작업이 진행 중이다.

2023년 복원이 끝나면 조선시대 군무를 관장하던 삼군부, 관리의 감찰을 담당했던 사헌부 등 육조 거리에 있던 관아 건물의 유구가 지상에 노출되고 건물 상부 일부가 재현될 예정이다. 훼손된 광화문 월대와 해치상도 복원되어 광화문을 찾는 시민을 맞이할 것이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왕조에 대한 한국인의 시선이 우호적이지만은 않은데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표 광장인 광화문 광장의 콘텐츠가 조선왕조 역사로 채워지게 된 것은 어떻게 된 연유인가?

15-16세기 육조거리 (사진=서울시 '광화문 광장')
15-16세기 육조거리 (사진=서울시 '광화문 광장')

일제 식민지 시기 광화문 훼손

광화문 광장의 역사는 조선왕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1395년 경복궁 앞에 조성한 육조거리에서 비롯된다. 육조거리에는 조선왕조 국정 중심기관인 의정부와 중앙 행정기관인 육조, 사헌부, 삼군부, 한성부가 있었다.

1916년 당시 광화문. 광화문 앞에 월대가 보인다. 월대는 궁궐과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이다.(사진=문화재청)
1916년 당시 광화문. 광화문 앞에 월대가 보인다. 월대는 궁궐과 같은 주요 건물 앞에 설치하는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이다.(사진=문화재청)

육조거리는 외국의 사신들이 궁궐에 도착할 때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만 육조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거리였다. 육조거리에서는 과거시험이 치러졌으며, 신무기를 시험하거나 산대놀이와 같은 연희가 어우러졌다.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정치와 행정, 과학기술과 문화 중심 공간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면서 광화문 광장과 경복궁은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26년 경복궁 내에 조선총독부 청사를 준공하고 다음 해에는 광화문을 경복궁 동쪽 건춘문 북쪽으로 이전하였다.

경복궁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한 각종 박람회가 열리는 공간이 되었고, 왕궁으로서의 위엄은 사라졌다. 육조거리도 광화문통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경복궁 - 광화문 - 육조거리로 이어지던 조선왕조의 상징 공간은 식민통치 홍보 박람회장 – 조선총독부 – 광화문통으로 이어지는 일제 식민통치 중심 공간이 되었다. 훼손된 경복궁과 광화문을 바라보는 조선인의 시선에는 일제에 대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조선왕조에 대한 원망과 불신도 함께 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유산으로 채워지는 광화문 광장

해방 후 광화문 광장은 대한민국의 중심 광장으로 재편되었다. 중앙청과 정부종합청사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시차를 두고 들어섰다.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는 시민의 광장이 되면서 광화문 광장은 한국을 상징하는 한국의 대표 광장이 되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일제의 잔재를 걷어내고 조선왕조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1968년 이순신 장군 동상이 설치되고, 일제에 의해 훼손된 광화문이 복원되었다.

1995년에는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의 일환으로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다. 2009년에는 자동차만 다니던 광화문 거리가 지금과 같은 광화문 광장으로 조성되었고, 세종대왕 동상이 건립되었다.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역사적 인물의 동상 건립에 대한 건립 당시 사회적 반응은 전혀 달랐다. 2009년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 동상 건립 시에는 반대 여론이 거의 없었다.

1968년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막식(사진=서울시 ‘광화문광장’)
1968년 충무공 이순신 동상 제막식(사진=서울시 ‘광화문광장’)

그러나 1968년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60년대는 식민사관의 극복과 민족적 자존감 회복이 과제였던 시기였다. 1968년 일제에 의해 훼손된 광화문 복원은 식민사관 극복의 상징적인 사업이었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과 싸워 27전 27승이라는 역사적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그는 식민 통치로 상처받은 민족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고, 강대국에 둘러싸인 한국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힘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역사 인물이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이 역사에서 소환되어 한국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그 상징으로 동상이 광화문거리에 설치된 것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은 이순신 장군을 오랫동안 존경해온 박정희 대통령의 적극적인 관심 하에 이루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지식인들은 이순신 장군의 동상 건립을 군인 출신의 박정희 대통령과 연결 지어 해석하였고, 이는 조선왕조 이순신 장군 동산 건립에 대한 비판적 여론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비판적 인식의 밑바닥에는 근본적으로 1960년대 한국인들이 조선왕조에 대해 나라를 빼앗긴 못난 왕조라는 부정적 인식이 깔려 있었다. 그래서 한국인이 존경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임에도 불구하고 날선 비판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21세기 들어 한국 민주주의와 경제가 발전하고, 한국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보편 문화로 성장하였다. 한국인들의 역사 인식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21세기를 있게 한 과거로서 20세기 한국 역사, 그리고 그 이전의 조선시대 역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대두되었다.

2009년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사진=서울시 ‘광화문 아카이브’)
2009년 세종대왕 동상 제막식(사진=서울시 ‘광화문 아카이브’)

이는 2009년 역사 위인인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 광장에 들어서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3년 문화재 복원이 끝나면 조선왕조 관아 건물이 광화문 광장의 중심 콘텐츠로 새롭게 자리 잡는 것도 시민들이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조선왕조 관리의 규찰을 담당하던 사헌부 건물 터 상상도. 2023년 광화문 광장 복원 후 시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서울시 '광화문광장')
조선왕조 관리의 규찰을 담당하던 사헌부 건물 터 상상도. 2023년 광화문 광장 복원 후 시민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사진=서울시 '광화문광장')
2023년 복원 후 광화문 광장 전경 상상도(사진=서울시 ‘광화문 광장’)
2023년 복원 후 광화문 광장 전경 상상도(사진=서울시 ‘광화문 광장’)

21세기에 남아 있는 조선사회의 유산

21세기 한국 사회의 발전은 21세기만의 노력의 결과인가. 역사는 그렇게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21세기 한국사의 성취는 가까이는 해방 이후의 한국 현대사의 전개에서,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전통사회 전개과정에서 찾아야 한다.

조선사회는 유교사회이고 농업사회이다. 조선의 유교는 교육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근대 이전 단계 인류의 보편적인 지배층 충원 방식은 신분 세습이었다. 그러나 조선 사회는 과거 시험을 통해 관료를 선발하였다. 학업 성취도가 관료 선발의 기준이 되었기에 조선사회에서 교육은 매우 중시되었다.

과거 시험을 통해 선발된 조선의 관료 시스템은 동 시대 다른 국가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국가 경영을 가능하게 하였다. 조선사회 국가가 보유한 군사력과 경찰력이 강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조선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교육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 체제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농사는 시기를 놓치면 수확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농민은 근면할 수밖에 없었고, 근면한 농민들의 협업에 의해 뒷받침되는 농업 생산력은 조선사회 경제 체제를 유지시켜 주었다.

조선사회의 경직된 성리학 사유체계, 관료의 부패, 엄격한 신분제, 여성 차별 등은 조선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힘든 삶을 살게 만들었다. 조선 사회는 이 같은 그림자가 있었음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빛이 있었다.

그 빛은 조선사회를 유지한 힘이 된 교육 체계, 안정적인 관료 체제, 협업체제를 갖춘 근면한 농민이었다. 이 같은 사회 기반은 해방 이후 한국 사회 성장의 뿌리가 되었다.

이제 한국 사회와 역사학계는 2020년 느닷없이 다가온 한국 사회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적 성장의 원인과 그 동력을 찾는 작업을 시작하여야 한다.

이 같은 문제 제기는 현 시점 한국 사회에 필요하고도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의 지식인, 언론인, 학자들은 한국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너무 익숙해서 이 같은 문제 제기에 낯설어 하고 심지어 국뽕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양극화, 저출산, 사회적 분열과 갈등과 같은 한국 사회의 산적한 난제들의 해결은 한국 사회가 헬 조선이라는 인식과 전제 하에서는 그 해법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해법은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한국 사회를 전면적으로 리셋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가능할 것이다.

<강진갑 객원논설위원, 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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