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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의 픽(pick)무비] 당신의 오늘과 가장 닮은 영화 '우연과 상상'

[이은선의 픽(pick)무비] 당신의 오늘과 가장 닮은 영화 '우연과 상상'

  • 기자명 이은선
  • 입력 2022.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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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이은선 영화저널리스트

[뉴스더원] 하마구치 류스케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구로사와 아키라 등을 잇는 일본의 차세대 거장으로 강력하게 손꼽히는 연출가다.

지난해 연말 국내 개봉한 <드라이브 마이 카>는 제74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제94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국제장편영화상 등을 수상하며 전 세계에 감독의 이름을 알렸다. 동명작을 포함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몇 개를 엮어 각색한 작품이다. 이후 <해피 아워>(2015) 등 감독의 과거 연출작도 꾸준히 국내에 소개되고 있다.

신작 <우연과 상상>은 세 개의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다. 느슨하게 서로 연결되는 방식이 아닌, 하나의 이야기가 끝나면 엔드 크레딧이 모두 올라간 뒤 다음 작품이 소개되는 독자적 형식이다. 에릭 로메르 감독의 <파리의 랑데부>(1994) 같은 영화를 떠오르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데, 실제로 감독이 레퍼런스로 밝히기도 했다.

1화 <마법(보다 더 불확실한 것)>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 택시 안에서 친구 츠구미(현리)의 새로운 연애 상대 이야기를 듣는 메이코(후루카와 코토네)의 상황을 그린다.

2화 <문은 열어 둔 채로>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교수 세가와(시부카와 키요히코)에 접근한 나오(모리 카츠키)가 등장한다. 나오는 세가와 앞에서 그가 쓴 책의 일부를 낭독한다.

3화 <다시 한 번>은 20년 만에 고향을 찾은 나츠코(우라베 후사코)가 오래도록 만나고 싶었던 고교 동창생과 재회하는 내용이다.

<우연과 상상>은 제목 그대로의 영화다. 두 명의 인물이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기본 바탕에 두고, 여기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우연과 상상에 근거해서 이야기를 펼친다.

범상한 대화를 듣는다고 생각했던 관객의 허를 찌르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하고, 인물들 역시 예상치 못한 당혹스러움을 맞닥뜨리기도 한다.

츠구미가 털어놓는 연애 상대는 사실 메이코의 전 애인이다. 세가와를 망신 주려는 목적을 가졌던 나오는 오히려 자기 자신의 실수로 커다란 곤경에 처하고 만다. 나츠코가 그토록 찾아 헤매다 어렵사리 만난 동창은, 실은 그의 친구가 아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것이 삶의 모양과 밀접하게 닮아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결코 우리가 계획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 일상의 사소한 모든 순간은 수십 가지의 우연과 그 우연을 맞닥뜨린 개인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 영화와 삶은 닮아있고 둘은 서로를 모방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 표현이 가장 잘 어울리는 오늘날의 연출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영화라는 형식으로서 삶의 우연성을 포착하고 거기에서 발생하는 상황과 관계의 아이러니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연에 기대어 서사를 발전시키는 방식이 손쉬운 스토리텔링의 작법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다만 <우연과 상상>에서 이 방식은 한계라기보다 자유로운 실험처럼 보인다.

감독은 이것이 ‘리얼리티’라고 설명한다. “우연은 드라마로 만들기도 어렵지만 일상에 흔한 것이기도 하죠. 우연이 있는 것이 이 세상의 리얼리티이고, 반대로 말하면 이 세계를 그리는 것은 우연을 그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대사 처리, 인물의 상황에 순발력 있게 반응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은 이 영화가 즉흥성에 기대어 촬영된 것이라는 손쉬운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러나 이는 관객의 착각이다. 핵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운율이 느껴지는 대사 연기는 즉흥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불가능한 영역이다.

보기와 달리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품은 꼼꼼한 각본, 반복적인 리허설을 통해 완성된다. 때문에 <우연과 상상>을 비롯한 그의 영화는 어쩌면 관객의 착각까지 계산된 결과물이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이 같은 작품의 톤 앤 매너는 감독의 독특한 연기 연출 방식에서 비롯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배우들과 오랜 시간 동안 대본 리딩 작업을 거친다. ‘대본 워크숍’으로 알려진 과정이다.

특정한 감정을 정확하게 연기하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그 반대다. 배우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대사를 반복해서 연습한다. 그의 입에서 기계적으로 대사가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감독이 배우의 입에 잘 붙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대사는 촬영을 시작한 이후까지 수시로 변경한다. 그리고 배우가 현장의 카메라 앞에 선 이후에는 어떠한 연기 디렉션도 내리지 않는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배우가 캐릭터 자체가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다. 다만 자동적으로 외게 된 대사를 발음할 때, 현장에서 발생하는 우연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영화를 만든다. 촬영하는 날 배우의 컨디션, 갑작스레 변경되는 현장의 조건 등이 우연의 요소가 된다.

이 방식은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에 생기를 불어넣는 비법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는 연출가의 지휘 아래 완벽하게 통제된 진공 상태에서 탄생한 결과물이 아닌 숨을 쉬는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애초에 영화가 삶을 담기 위한 도구라면, 오늘날 하마구치의 작업은 그에 가장 근사하게 근접한 ‘우연과 상상’의 결과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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