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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여행] 20만 그루 해바라기 너머 고구려 성벽, 연천 ‘호로고루’ 

[스토리텔링 여행] 20만 그루 해바라기 너머 고구려 성벽, 연천 ‘호로고루’ 

  • 기자명 임요희
  • 입력 2021.09.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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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통일바라기 동산
임진강 ‘호로탄’에서 만나는 고구려 성벽 
남한에서 고구려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된 곳

해바라기 20만 그루가 꽃물결을 이루는 ‘연천 호로고루 동산’ ⓒGettyImages
해바라기 20만 그루가 꽃물결을 이루는 ‘연천 호로고루 동산’ ⓒGettyImages

[글·사진 임요희 여행작가] 9월은 날씨가 좋아 어디를 가도 좋지만, 막상 떠나려 하면 어디를 가야 갈지 선택하기 어려운 달이다. 물 맑은 계곡도 마땅치 않고, 색색의 단풍놀이도 이르다. 이럴 때는 노란 해바라기가 꽃물결을 이루는 ‘연천 호로고루 동산’으로 목적지를 정해보면 어떨까. 

전국적으로 해바라기가 자취를 감추는 9월. 하지만 연천은 사정이 다르다. 지금 대한민국 최북단 연천에는 ‘통일바라기’라는 별칭의 해바라기 20만 그루가 가을 햇살을 흠뻑 빨아들이며 기운차게 자라고 있다. 남한에서 보기 드문 고구려 유적지인 ‘호로고루’에서 고구려의 기상도 느끼고 해바라기 향기에도 취해보자.

임진강 천애 절벽 위 산처럼 우뚝 선 호로고루
임진강 천애 절벽 위 산처럼 우뚝 선 호로고루

임진강 성벽 ‘호로고루’

이국적인 어감의 ‘호로고루’는 임진강의 옛 이름인 호로하(瓠瀘河)에서 따온 순우리말이다. 호로하란 표주박 형태의 하천이란 의미로 임진강이 구불구불 흐르는 모습에서 따온 명칭이다. 여기에 보루, 성을 뜻하는 고루를 덧붙였다. 호로고루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임진강 성벽’이 될 것이다. 

개성에서 한양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임진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한두 사람이면 모르지만 대규모 인력이 이동할 때 일일이 배를 준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촌각을 다투는 전시에는 더 어려운 일이었다. 

이럴 때 사람들은 호로탄을 이용했다. 임진강 여울목 ‘호로탄’은 두 다리로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강의 깊이가 불과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호로고루가 자리 잡은 여울목 ‘호로탄’은 물이 얕아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호로고루가 자리 잡은 여울목 ‘호로탄’은 물이 얕아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장수왕, 남쪽으로 진격하다

고구려 장수왕(394~491)은 오래 살아서 이름이 장수왕이다. 그는 97세까지 살면서 대전 일대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고구려는 강한 나라였고 만주 일대부터 한반도 남쪽까지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원한 권력은 없는 것인가. 서기 551년, 양원왕 7년에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75년간 통치해오던 한강 유역 일대를 백제에 내어주고 말았다. 백제는 그 기념으로 단양적성비를 쌓았다. 하지만 백제의 영화 역시 짧았다. 바로 신라에게 한강 유역 빼앗기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쫓기듯 한강을 떠나온 고구려는 연천 임진강 유역으로 후퇴했다. 호로탄은 배를 타지 않고도 도강이 가능했기에 특별한 경계태세를 갖추어야 했다. 고구려는 적의 공격에 대비해 임진강 북안에 성을 쌓았다. 이것이 호로고루다. 이때부터 120여 년 동안 임진강은 고구려와 신라의 군사분계선으로 굳어졌다. 

삼각 형태를 이루는 호로고루. 사진은 한참 발굴이 진행될 때의 모습이다.
삼각 형태를 이루는 호로고루. 사진은 한참 발굴이 진행될 때의 모습이다.

재미산이라 불린 성벽

임진강 천애 절벽 위 삼각 형태로 자리 잡은 호로고루는 둘레 400m의 보루였다. 랴오닝에 있는 안시성의 둘레가 3km 안팎이었으니 호로고루가 마을을 이룰 만큼 큰 성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진강 절벽 위에 우뚝 선 모습은 적지 않게 위압적이어서 마을 사람들은 호로고루를 재미산(財尾山)이라고 불렀다. 

원래는 성의 고어인 '잣'과 산의 고어인 ‘뫼’를 합친 ‘잣뫼산’에서 출발했다. 이 단어를 한자로 표기하는 과정에서 ‘재미산’이 된 것이다. 강벽의 단애를 이용한 성 쌓기는 임진강 유역에서만 발견되는 특징이라고 한다. 

660년 백제를 정복한 신라의 문무왕은 8년 뒤 고구려마저 정복했다. 그리고 한반도를 삼키려던 당나라의 야욕을 물리치고 676년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던 이곳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였던 이곳에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해바라기가 가득 피어 있다.
드라마 촬영지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연천 호로고루.
드라마 촬영지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연천 호로고루.
연천은 안보체험관광 등 특화된 관광지로 이미지를 재정립해 나가는 중이다.
연천은 안보체험관광 등 특화된 관광지로 이미지를 재정립해 나가는 중이다.
호로고루 일대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포토 포인트도 많다.
호로고루 일대는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포토 포인트도 많다.

군사적 요충지였던 호로하 

662년 문무왕 2년, 호로고루에서 작은 전투가 벌어졌다. 신라의 김유신이, 평양에 주둔하던 당나라 소정방 군에게 식량을 전달한 뒤 호로탄을 건너는 중이었다. 신라군의 진군 속도가 느려진 틈을 타 고구려군이 싸움을 걸어왔다. 하지만 김유신은 어렵지 않게 고구려군을 제압하고 무사히 강을 건너 신라로 돌아왔다.

호로고루에서 다시 한 번 격돌이 펼쳐진 것은 통일전쟁의 마무리 단계에서였다. 계림주도독부를 설치해 신라를 제어하려던 당나라와, 어렵게 차지한 한반도 땅을 지키려는 신라 간 큰 싸움이 벌어졌다. 

임진강을 배경으로 두 나라가 아홉 번의 접전을 펼치는 중에 신라가 2천여 당군의 목을 베며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호로하에 빠져 죽은 당군은 그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였다고 한다. 기세를 몰아 당나라 군대를 위로 위로 밀어붙인 신라는 당 황제로부터 대동강 이남을 영토로 공인받게 되었다. 

1500년의 세월이 흘러 다시 한번 한반도에 동족 간의 전쟁이 펼쳐졌다. 북한군의 주력 전차부대는 개성에서 서울로 진격하면서 호로고루의 얕은 여울목을 이용해 강을 건넜다. 이처럼 호로고루 일대는 고대로부터 연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군사적 요충지로 기능했다. 

대형 백화점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던 임진강 유역은 지금 참게잡이 어선 정도만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대형 백화점이 들어설 정도로 번성했던 임진강 유역은 지금 참게잡이 어선 정도만 오락가락하는 중이다.

한강 못지않게 번성했던 임진강 유역

지도를 보면 임진강과 한강은 ‘<’ 형태로 대칭을 이루는 것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강은 서해에 이르러 하나로 합쳐지는데 1945년 국토가 둘로 나뉘기 전까지만 해도 임진강은 한강과 물길로 이어져 매우 번성했다. 

기록에 의하면 1930년대만 해도 호로고루 부근인 고랑포구까지 대형 선박들이 들어와 물자를 부려놓았다고 한다. 이에 고랑포구는 개성과 서울의 물류 거점도시로서 화신백화점 분점이 들어설 정도로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임진강 유역은 군사시설 보호구역에 묶여 민간인의 거주, 개발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강 유역이 수도 서울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 가는 동안 임진강은 조용히 잠자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남북 관계에 훈풍이 불면서 임진강 권역도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연천은 자연지질관광, 안보체험관광 등 특화된 관광지로 이미지를 재정립해 나가는 중이다.

땅 밑에 잠자고 있던 고구려 성벽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다.
땅 밑에 잠자고 있던 고구려 성벽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다.
임진강 유역이 용암대지다 보니 성벽의 재료도 현무암이다.
임진강 유역이 용암대지다 보니 성벽의 재료도 현무암이다.

고구려 성벽의 실체가 드러나다

삼국 전쟁이 끝났을 때 호로고루는 성벽 곳곳이 무너진 상황이었다. 신라군은 고구려 성벽을 허물지 않고 그대로 둔 상태에서 성벽을 덧쌓는 방식으로 성을 보수했다. 고구려 성벽 위에 신라 성벽에 덧씌워졌으니 아무도 이곳이 고구려 유적인 줄 알지 못했다. 

호로고루의 수난은 현대에 들어 본격화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이 포대를 설치하면서 성벽을 크게 훼손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휴전과 함께 호로고루 일대가 군사지역으로 묶이면서 민간인의 출입이 제한되었다. 자연스럽게 문화재 보호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던 1990년 출입제한이 완화되자 사람들이 중장비를 끌고 와 성을 밀어버렸다. 돌 틈에 숨어 있던 뱀을 잡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유적지인 줄 모르고 한 행동이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성을 훼손하는 과정에서 안에 갇혀 있던 고구려 성벽 일부가 세상에 드러났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1991년 지표조사가 이루어졌고 이후 네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고구려 성벽의 축성법, 고구려 건물지, 집수시설 등이 드러나게 되었다.

호로고루는 남한에서 고구려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이다.
호로고루는 남한에서 고구려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된 곳이다.
2000년 들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2000년 들어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남한에서 고구려 기와가 가장 많이 나온 곳

문화재 발굴 때 호로고루에서 가장 많이 쏟아져 나온 건 기와였다. 삼국 시대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알려졌다. 기와는 최고급 건축자재로 궁궐, 관아, 학교, 사찰 등 공공용 건물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기와는 제작 단계서부터 철저한 관리가 이루어졌는데 심지어 폐기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3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호로고루를 지을 당시 성벽 건설에 사용된 기와의 물량을 새긴 기와가 발견되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우리 선조가 얼마나 꼼꼼한 기록문화를 갖고 있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였다. 이로써 호로고루는 남한에서 고구려 기와가 가장 많이 출토된 곳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또 하나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게 뱀이었다. 호로고루는 돌들이 흙더미에 묻혀 있는 구조라 뱀들이 숨어 살기 좋았다. 마을 주민들이 성을 무너뜨린 것도 돌 틈에 숨어 있는 뱀을 잡아다 내다팔기 위해서였다. 발굴조사 당시 발견된 뱀만 50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중 반수는 치명적인 독을 가진 독사였다. 

홍보관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홍보관 입구에 우뚝 서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대형 비석을 세웠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이 대형 비석을 세웠다.

북한이 선물로 보내온 ‘광개토대왕릉비’ 

호로고루 옆에 자리 잡은 홍보관은 ‘작은 고구려역사박물관’이다. 호로고루의 역사, 축성방법, 발굴조사 과정 등을 일목요연하게 전시하고 있으며, 연와문(연꽃무늬)수막새, 착고, 치미(망새) 등 고구려 기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전쟁 물품이었던 찰갑(미늘갑옷), 호자(이동식 소변기)의 존재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홍보관 입구에 우뚝 서 있는 비석은 이름도 유명한 ‘광개토대왕릉비’다. 장수왕은 재위한 지 4년째 되던 해인 414년 아버지 광개토대왕을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우고 선왕의 정복 활동, 고구려 왕의 계보를 요약하여 새겨 넣었다. 

광개토대왕릉비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은 평생에 걸쳐 64개 성과 1,400촌을 정복했다고 한다. 또한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하였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 내치에도 힘썼다. 

호로고루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는 북한에서 제작한 모형으로 2002년 남한에 선물로 준 것이다. 실물은 중국 길림성에 있으며 높이 6.39m, 무게 37t의 거대한 규모를 자랑한다. 

‘원조 두지리 매운탕 본점’은 합리적인 가격에 푸짐한 양의 민물매운탕이 특징이다.
‘원조 두지리 매운탕 본점’은 합리적인 가격에 푸짐한 양의 민물매운탕이 특징이다.
메기 1인분, 빠가 1인분을 한 데 넣고 끓이면 맛이 보완을 이루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메기 1인분, 빠가 1인분을 한 데 넣고 끓이면 맛이 보완을 이루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파주에 있는 연천 맛집 ‘원조 두지리 매운탕 본점’ 
호로고루에서 남쪽으로 5분 거리에, 임진강을 가로지르는 ‘신장남교’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바로 파주시 두지리다. 두지리에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원조 두지리 매운탕 본점’은 합리적인 가격에 푸짐한 양의 민물매운탕을 맛볼 수 있어 매운탕 마니아 사이에서 제법 유명한 집이다. 파주시에 있지만 연천과 가까워 연천 맛집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도 독특하다. 

건더기를 다 건져 먹고 나면 주인아주머니가 직접 수제비를 뜯어 넣어주는데 시중에서 파는 녹말 수제비가 아닌 쫀득한 맛이 살아 있는 제대로 된 매운탕 수제비 맛을 볼 수 있다. 수제비로 인해 걸쭉해진 국물은 한층 맛이 깊어져 배부른 데도 박박 긁어먹게 된다.

메기 1인분, 빠가 1인분을 한 데 넣고 끓이면 맛이 보완을 이루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메기매운탕이 15,000원, 빠가매운탕이 20,000원. 식사를 끝낸 후에는 소화도 시킬 겸 길 건너에 있는 ‘임진강 황포돛배 나루터’까지 둘러볼 것을 권한다. 노을 비끼는 아름다운 임진강변의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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