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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여행] 임진왜란의 흔적을 찾아라! 마산일본성, 진해 웅천왜성

[스토리텔링 여행] 임진왜란의 흔적을 찾아라! 마산일본성, 진해 웅천왜성

  • 기자명 임요희
  • 입력 2021.07.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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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영구 주둔할 야심을 품었던 일본군
남해안 일대에 30개의 왜성 흩어져 있어
왜성의 복잡한 구조, 조·명연합군도 방어 뚫지 못해

남해에 면해 있는 마산, 진해 일대는 임진왜란의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남해에 면해 있는 마산, 진해 일대는 임진왜란의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글·사진 임요희 여행작가] 연일 무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코로나 와중이라 어디 마음 놓고 피서도 떠나기 힘든 실정이다. 이럴 때는 인적이 뜸한 유적지를 찾아 산책도 즐기고, 역사공부도 해보면 어떨까.

남해에 면해 있는 마산, 진해 일대는 거리상 일본과 가깝다 보니 일본군의 침략을 가장 먼저 받아낸 장소이면서 가장 늦게까지 일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그런 만큼 적군이 남긴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특히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경남 지역에 성을 쌓은 후 일대를 자기들 통치권 안에 두고 영구 주둔할 야심을 품었다.

역사는 아픈 상처에서도 교훈을 남긴다. 진해 웅천왜성의 모습
역사는 아픈 상처에서도 교훈을 남긴다. 진해 웅천왜성의 모습

남해안 일대에 30개의 왜성 흩어져 있어

왜성(倭城)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일본군이 쌓은 성을 일컫는다. 일본성(わじょう, 와조)이라고 해야 맞지만 일본을 얕잡아 부르는 접두사 왜(倭)를 성(城) 앞에 두었다. 마산왜성의 경우 ‘마산일본성’이라고 고쳐 부르고 있으나 남해안 일대 30개의 일본성 대부분은 왜성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조선에 쌓은 성벽을 굳이 둘러볼 필요가 있을까. 일본인에게만 의미 있는 곳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아픈 흔적도 흔적이다. 역사는 기쁨의 노래만 부르지 않는다. 아픈 상처에서도 교훈을 얻어야 한다.

보존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사적에서 퇴출된 마산일본성
보존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사적에서 퇴출된 마산일본성

사적에서 퇴출된 마산일본성

경남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자리 잡은 ‘마산일본성’은 정유재란이 한창이던 1597년(선조 30년)에 일본군이 용마산에 축조한 성곽이다. ‘용마산성’으로도 불린다. 왜장 다테 마사무네가 마산의 용마산을 전진기지로 삼기 위해 축성을 시작하였고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와 그의 아들이 완공을 보았다. 일본 역사책에는 창원성(昌原城)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성 외부로 일본의 함선이 직접 배를 댈 만큼 바다에 인접해 있었다고 한다. 

마산일본성은 1963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 제35호로 지정되었으나 유적으로서 보존가치가 없다고 판단되어 1969년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다.   

기념 비석에 새겨진 건립 연도는 1968년으로 되어 있다.
기념 비석에 새겨진 건립 연도는 1968년으로 되어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국가 유공자를 추모하는 마산충혼탑이 바로 이 마산일본성 위에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높이 10m의 충혼탑 내 봉안각에는 2035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기념 비석에 새겨진 건립 연도를 확인하니 1968년으로 되어 있다.

1968년이면 문화재 지정에서 해제되기 전이다. 원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다 허물어져 가는 왜성이다보니 그럭저럭 일이 성사된 모양이다. 그리고 이듬해 마산일본성은 사적 목록에서 방출되었다.  

마산왜성과 충혼탑을 둘러싸고 시민단체와 보훈단체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마산왜성과 충혼탑을 둘러싸고 시민단체와 보훈단체 사이에 마찰이 있었다.

충혼탑을 왜성 위에 건립한 이유

2009년 다시 한번 마산왜성과 충혼탑을 둘러싸고 설전이 펼쳐졌다. 일본이 조선 침략을 영구화하기 위해 쌓은 석축 위에 호국영령을 기리는 충혼탑이 웬말이냐며 당장 이전해야 된다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심지어 충혼탑이 서 있는 곳은 천수각이 있던 곳이라며 시민단체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천수각이란 일본성 안에서 가장 높게 지은 건축물로 성의 상징이나 마찬가지다.

시민단체가 충혼탑의 위치를 문제 삼은 것과 달리 유가족 중심의 보훈단체는 지금 위치가 접근성도 좋고, 전망도 좋다며 이전을 반대하고 나섰다. 결론적으로 충혼탑 이전은 무산됐다.

용마산에서 바라본 마산 시내의 모습
용마산에서 바라본 마산 시내의 모습

마산일본성이 있는 곳은 마산시민의 휴식공간인 ‘산호공원’이다. 마산 시내에서 가까운 데다 마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여 산책 명소로 통한다. 전체적으로 조경이 잘 되어 있고 다양한 체육시설과 조형물이 갖춰져 있어 제법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특히 이곳 ‘시의 거리’ 산책로에는 ‘가고파’ ‘고향의 봄’ 등의 노래비가 서 있다. ‘가고파’의 이은상 시인은 마산 태생이고, ‘고향의 봄’ 이원수 시인은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산일본성’은 마산시민의 산책코스인 ‘산호공원’ 내에 있다.
‘마산일본성’은 마산시민의 산책코스인 ‘산호공원’ 내에 있다.

마산왜성 일대를 공원으로 만든 일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왜성을 전부 사적으로 등록하는 작업에 착수했는데 사적으로 등록되면 본국에서 관리인을 파견해야 하는 게 큰 문제였다. 전쟁 중에 이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 일제는 하나의 꾀를 내게 된다. 일대를 공원화하여 자연스러운 관리가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마산일본성도 그때 공원으로 꾸며져 지금에 이르렀다. 지금껏 남아 있는 아름드리 나무들은 당시 일제가 식재한 것들이다. 

마산합포구 산호동 ‘산호공원’ 안에 마산일본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경남 지역의 다른 왜성들이 지역 기념물로서 공식적인 보호를 받는 것이 비하면 마산일본성에는 흔한 표지판 하나 서 있지 않다. 상대적으로 이 왜성이 많이 훼손된 것도 있지만 2009년 충혼탑 논란에 휘말리면서 조용히 흔적이 지워진 듯하다. 

웅천왜성은 산정에서부터 길게 뻗어 내려 제법 큰 규모를 이루었다.
웅천왜성은 산정에서부터 길게 뻗어 내려 제법 큰 규모를 이루었다.

트래킹코스로 사랑 받는 웅천왜성

마산에서 차로 40분가량 달리면 또 하나의 왜성과 만날 수 있다. 진해시 남산에 자리 잡은  웅천왜성(熊川倭城)이 그것이다. 남산에 있다하여 ‘남산왜성’으로도 불린다. 웅천왜성은 현재 경상남도 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정에서부터 능선을 따라 길게 뻗어 내려 제법 큰 규모를 이루었던 성이지만 지금은 산기슭과 산정에 약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도다. 다만 아무 표시가 없는 마산일본성과 달리 곳곳에 ‘웅천왜성’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인 만큼 당당하게 유적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웅천왜성 가는 길은 산책로라기보다 트래킹코스라고 해야 옳다. 입구에서부터 20분가량 산길을 따라 땀을 뻘뻘 흘리며 등산을 해야 정상에 닿을 수 있다. 한적한 오솔길을 따라 벤치와 체육시설 몇 기가 자리 잡고 있을 뿐 잘 다듬어진 공원의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산행을 즐기는 시민이 적지 않아 으슥한 느낌은 없다.  

웅천왜성이 자리한 남산 정상에 서면 남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웅천왜성이 자리한 남산 정상에 서면 남해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전략적 요충지였던 진해 남산

웅천왜성은 지형상 만과 만 사이 반도처럼 돌출한 남산 정상부에 위치하여 육로로의 이동이 편하고, 바닷길을 따라 안골포, 마산, 가덕도, 거제도와 바로 닿을 수 있었다. 말하자면 전략적으로 최고의 요충지였던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장인 ‘고니시 유키나가’도 이곳에 주둔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웅천왜성의 뿌리는 조선의 웅포성(熊浦城)이다. 자료에 의하면 임진왜란 원년인 1592년(선조 25)에 왜구의 공격에 대비해 조선에서 쌓기 시작한 성을 일본군이 가로채 개축한 것으로 나와 있다. 

아무 표시가 없는 마산일본성과 달리 ‘웅천왜성’은 표지판이 잘 세워져 있다.
아무 표시가 없는 마산일본성과 달리 ‘웅천왜성’은 표지판이 잘 세워져 있다.

웅천왜성의 전체 면적은 약 5,000평. 전형적인 일본성의 구조를 띠고 있다. 일본성에서 해자와 성벽으로 구성된 구획을 구루와(曲輪) 혹은 마루(郭,丸)라고 하는데 일본성은 이런 구루와가 중첩되어 있다. 

웅천왜성 역시 일본성을 따라 정상부 혼마루(제1성곽)를 중심으로 니노마루(제2성곽), 산노마루(제3성곽)로 질서 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해안의 함선과 바로 연결되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현재 천수각 등 목조건물은 불타 사라지고 없다.

폐허로 변해가는 웅천왜성. 왜성은 방어력은 출중해도 견고성은 떨어진다.
폐허로 변해가는 웅천왜성. 왜성은 방어력은 출중해도 견고성은 떨어진다.

조명연합군도 뚫지 못한 출중한 방어력

이러한 다층적인 성의 구조는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기에 좋아 임진왜란 때 탁월한 방어력을 보여주었다. 왜성은 성벽의 방어선이 뚫리면 바로 성이 함락되는 일반 산성에 비하면 굉장한 방어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내부 구조도 미로처럼 설계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남해안 30개의 왜성 가운데 전투 중에 함락된 왜성은 한 개도 없었다. 

일본성은 석벽의 틈새를 회반죽이나 진흙으로 메우지 않고 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메쌓기 방식으로 건축되었기 때문에 건축과 유지, 보수가 빨랐다. 다만 견고성은 떨어져 쉽게 허물어지는 단점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왜성의 성벽은 바로 해체돼 민가를 짓는 데 사용했다. 

웅천왜성 가는 길은 흙길이지만 드문드문 벤치가 놓여 있어 쉬어가기 좋다.
웅천왜성 가는 길은 흙길이지만 드문드문 벤치가 놓여 있어 쉬어가기 좋다.
웅천왜성 정상부의 모습. 이곳에 천수각이 있었을 것이다.
웅천왜성 정상부의 모습. 이곳에 천수각이 있었을 것이다.

일부 왜성의 경우 조선에서 군사적으로 재활용하기 위해 보수에 신경을 썼으나 마산왜성, 웅천왜성은 그렇지 못했다. 두 왜성의 보존상태가 유달리 안 좋은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육지에서는 명나라가 원군을 보내오고 해상에서는 이순신 장군이 큰 활약을 펼치면서 길었던 전쟁도 끝이 났다. 조명연합군의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일본성은 굳건히 버텼고 그 틈을 타 왜장은 안전하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순천왜성에서 농성하던 왜장 ‘고니시’도 무사히 귀국한 것을 보면 왜성의 방어력은 상상 이상이었던 듯하다.

신선하고 퀄리티 높은 스시 한 상. 생참치 배꼽살 등 귀한 재료가 보인다.
신선하고 퀄리티 높은 스시 한 상. 생참치 배꼽살 등 귀한 재료가 보인다.
마산에서는 생선을 통째로 튀겨 전을 만들어 먹는다. 사진은 도다리전
마산에서는 생선을 통째로 튀겨 전을 만들어 먹는다. 사진은 도다리전

현장에서 식재료를 공수하는 12가지 진수성찬

마산합포구 산호동에 자리한 ‘스시유’는 예약제로 운영하는 횟집이다. 메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셰프의 재량에 따라 한 상 잘 차려내는 소위 오마카세(お任せ) 식당이다. 오마카세란 우리말로 ‘맡긴다’의 뜻으로 요리계의 ‘턴키’인 셈이다. 

참복, 까치복, 참돔, 돗돔, 다금바리, 생참치회, 대문어, 무늬오징어, 아귀간, 가오리포 등이 차례로 상에 오르며 복어속껍질 튀김, 도다리 통전, 시메사바(고등어초회) 같은 이색요리도 즐길 수 있다.  

시세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지만 1인 5만 원부터 주문이 시작된다. 당일 아침 부산에 있는 단골 어시장으로 직접 달려가 해산물을 구입하기에 신선도는 기본이고 재료의 퀄리티가 높다.

스시유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것을 아들이 맡아 2대째 운영하고 있는 식당인데 오너 셰프와의 대화 중에 집 앞에 있는 ‘용마산성’ 이야기가 나왔다. 식사가 끝난 후 그가 직접 마산왜성 현장까지 안내해주어 무사히 취재를 마칠 수 있었다. 표지판 하나 없는 마산왜성이었기에 그가 아니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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