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장원섭의 맛있는 역사] 개미와 코르니게라

[장원섭의 맛있는 역사] 개미와 코르니게라

  • 기자명 장원섭
  • 입력 2022.06.13 00:00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원섭 본지 논설위원, 장안대학교 국제교류원장
장원섭 본지 논설위원, 장안대학교 국제교류원장

[뉴스더원] '코르니게라(Acacia cornigera)'라는 아카시아 종류의 나무가 있다. 이 나무가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개미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 나무는 성장하면서 개미가 내부에 들어와 살기에 적합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나무의 내부를 진짜 개미집으로 바꾸어 간다.  

나무의 모든 가지는 속이 비어 있다. 내부는 개미들의 생활을 위한 통로와 방으로 이용된다. 그러니까 이 나무는 자신의 몸 전부를 개미들에게 집과 은신처로 제공하는 셈이다. 

개미들은 자신들의 삶의 보금자리인 이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침입하는 민달팽이, 거미, 그리고 나무의 성장을 방해하는 나무좀 등 여러 해충을 퇴치해 준다.

또, 나무에 기생하려는 덩굴식물을 강력한 위턱으로 잘라 내기도 하고 마른 잎을 제거할 뿐 아니라, 줄기의 이끼를 긁어내고 그 자리에 소독 효과가 있는 자신들의 침을 발라 나무가 병들지 않도록 보살핀다.  

나무 내부의 연결 통로에는 흰 진딧물이 가득 서식하고 있다. 그러나 개미들은 이들을 공격하지 않는다. 흰 진딧물의 분비물은 저들을 먹여 살리는 훌륭한 양식이 되기 때문이다.

개미 덕분에 이 나무는 다른 나무들의 그늘을 빨리 벗어나 직접 햇빛을 받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을 통해 이 나무는 개미, 흰 진딧물과 함께 서로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가면서 공생한다.

한 자리에 붙박이로 사는 식물이 어떻게 동물의 세계와 접목하여 자기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수 있었을까? 개미를 공생의 파트너로 삼은 코르니게라의 선택은 그야말로 흥미로운 수수께끼임이 틀림없다. 

대한민국 국회가 ‘백수들의 놀이터’라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들은 지도 오래다. 한때 우리나라 국회의 난장판 모습을 보고 세계의 유수 언론들은 ‘집단으로 싸우는 한국 정치인들’이니 ‘레슬링 경기장으로 변한 한국 국회’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내면서 조롱거리로 소개했던 적이 있었다.

법을 만드는 입법기관에서 법안처리를 놓고 난투극을 벌인다면, 그렇게 통과된 법이 과연 국민에게 얼마나 신뢰를 받을 수 있을까? 입법부는 물론 우리나라 법 제도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가 낮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

스스로 입법기관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저들의 되먹지 못한 행태는 수년이 흐르고 정권이 바뀌어도 달라진 것이 없다. 어제 만들어놓은 법을 오늘은 바꾸어야 한다면서 호들갑을 떠는 저들을 두고 국민이 외면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나라의 대외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집단은 국회의원들만이 아니다. 법을 집행하려는 집행관에게 쇠 파이프와 새총을 쏴대며 저항하는 무법천지의 노조원들도 있다. 권리를 합법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목숨을 담보로 끝까지 투쟁하겠다는 협박이 활개를 치는 한, 공생의 원칙이 바탕에 깔린 진정한 민주주의는 요원할 수밖에 없다.
 
갈등의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선은 이해관계의 다툼, 즉 밥그릇 싸움이 크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사회적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 과연 얼마나 공감대를 얻을 수 있으며, 그 주장이 객관적 사실에 얼마나 부합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느냐는 엄밀하게 따져봐야 한다. 

서로 다른 두 생물이 서로에게 특별한 해(害)를 주지 않으면서 서로의 이익을 추구하며 같이 살아가는 생활양식을 ‘공생(共生)’이라고 한다. 이와는 반대로 한쪽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다른 한쪽은 피해를 보는 경우를 ‘기생(寄生)’이라고 한다.

우리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거나 상대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공생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상대에게 피해를 주며 기생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는 각자의 선택이지만 그 결정에는 엄중한 사회적 책임이 수반된다.

우리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개미>라는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바로 '공생'의 개념 때문이다. 저자는 개미와 코르니게라의 공생관계를 인간사회에 접목시키려고 애를 태우는 에드몽 웰즈(Edmond Wells) 박사의 모습을 통해 참다운 인간 공동체 삶에 대한 본질을 깨우쳐 주고 있다. 

적절한 사회적 갈등은 사회발전의 원동력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정치와 사회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극한 대립과 지독한 증오만 넘쳐나고 있다. 국민에게 기생하는 식물국회가 그러하고, 공생은커녕 서로 항복을 요구하는 노사관계 또한 그러하다. 이러다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틀 자체가 무너지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마저 든다.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극한 대립에서 벗어나 서로 공생할 해법은 없는가. 아직도 늦지는 않았다. 정치권과 노사는 독선과 아집을 버리고 민주주의의 근간이 되는 법과 질서, 그리고 절차를 중시하는 자세로 국민 앞에 서라. 다 함께 사는 공생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다.

저작권자 © 뉴스더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